* 밤의 말발굽소리 : 이츠키히로유키(五木寬之)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자신에게 과연 ‘청춘’이라 부를 가치가 있는 시대가 있었을까, 하고 혼자 한밤중에 생각해보는 때가 있다.
‘청춘’이라는 언어에 붙어 다니는 상쾌한 느낌이나 아름다운 이미지는, 내 경우, 돌이켜 생각해봐도 전혀 기억의 밑바닥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와(昭和)27년에 상경하고부터 6년간의 대학생활이 굳이 말하자면 그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다시 한 번 그 때의 자신으로 돌려주겠다는 말을 악마로부터 들어도, 나는 고개를 저어 틀림없이 거절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그만큼 마음에 들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처럼 청춘을 회고하기에 우리들 세대는 약간 심정적으로 메말라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는 하되 그것이 과거에 대한 감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세대 친구들과 그 시대의 추억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도 때로는 있다.
우리들의 동지들 화제로 곧잘 등장하는 몇 가지 공통 단어, 그것이 문득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내음이나 느낌을 강렬하게 한순간 되살려줄 때, 모두는 왠지 모르게 먼데를 바라보는 듯 한 눈을 하고 입을 다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외식권(外食券) 식당”이라는 언어.
정월 3일,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이 간이식당만은 쉬지 않고 열려 있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귀성하지 못한 가난한 학생들이라던가, 방 얻어 사는 싼 월급쟁이 청년들이 어딘지 밝지 못한 얼굴을 마주 하고 정월의 외식권(外食券)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을 난 때때로 상기할 때가 있다.
개중에는 아기를 업은 어머니와, 어린이를 좌우에 앉힌 메마른 부친 일가족이, 식당의 구석 테이블에 모여 아침밥을 먹고 있는 모습 같은 도 보았다.
이 식당에서 사용되는 외식권을 와세다(早稻田)의 학생식당 레지에 팔면 얼마간의 현금으로 바뀌었다. 그건 당연히 식관법(食管法) 위반이었을 터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외식권을 판 돈으로 잼을 첨부한 쿠페빵을 씹던가, 크로켓을 사이에 넣은 식빵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덥석 물든가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생활 중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던지 이상하기 그지없지만 우리들은 가끔씩 여자를 사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 당시, 전국의 공창가(公娼街) 지역을 빈 틈 없이 소개한 귀중한 책이 있었는데, 그 토지의 유래로부터 현재 모양, 가격에서 사람 수까지 세세히 기재되어 있어 무척 도움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책을 도중에 잃어버려 내 손에 없지만, 그 책이 손에 들어오면 또한번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현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어, 현실보다도 몽상 등이 만들어 낸 비현실 세계를 애호하는 기분이 강하다. 현실 같은 거 없다, 인간에게 있어 확실하게 존재하는 건 자신이 만들어 낸 꿈의 세계뿐이라고 당시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키리코(Chirico, Georgio di,)의 그림이라던가, 뭉크의 석판화 등을 좋아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에서였으리라.
그런 이유로, 난 기타센쥬(北千住)나 다테이시(立石), 기타시나가와(北品川), 무사시신덴(武蔵新田) 같은 변두리 유곽(娼家)의 어두운 방에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도호쿠(東北) 출신 여자의 치덕치덕 끄는 슬리퍼 소리를 기다리면서, 러시아 세기말 작가들의 소설을 주워 읽거나 하는 일에 일종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장소에서 읽는데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이다. 나는 [카스파의 여인]이라던가, 나가사키(長崎) 근처의 약간 거친 스탠드바에서 듣고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그 레코드를 사가지고 와서 집의 스테레오에 걸어 놓고, 정좌를 하고 들어보았더니 전혀 마음에 호소해 오는 것이 없는 걸 발견하는 등의 경험이 가끔씩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 일로, 예를 들어 유메노큐사쿠(夢野久作)의 <어름의 끝(氷の涯)> 등과 같은 소설은, 역시 서제에서 훌륭한 가죽의자에 앉아 읽거나 하는 것 보다, 귀신 굴뚝이, 거대한 악마의 남근처럼 하늘을 뚫고 서있는 기타센주(北千住)의 뒷동네 작은 방에서, 여자를 기다리면서 읽는 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르치바ー셰프라던가, 부닝이라던가, 쿠프린이라던가, 그리고 역시 도스트예프스키 등도, 그 쪽이 맞아떨어지는 게 아닐는지.
그런 까닭에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그것이 <청춘>의 기분임에는 틀림없겠으나 몇 권인가 헌책을 주머니에 집어놓고 여자를 사러 나갔다. 그 때의 일을 언젠가는 한권의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써보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일반적인 <청춘>은 아니었으되 역시 나에게도 내 나름의 <청춘>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오히려 정말로 <청춘>같은 시기는, 연령적으로 30세를 넘어, 이미 중년에 발을 들여놓을 즈음,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북구로 달려 나간 쇼와40년 여름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당시의 일은 지금까지도 몇 개 소설 형식으로 쓰고 있다. 그건 생각해보면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만가(挽歌)의 일종인 듯한 기분도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상경해서 대학에 들어간 해, 나는 혈(血)의 메이데이 사건으로, 경관대가 실제로 권총을 민중에 향해 발포하는 모습을 이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내분(內紛)으로 실력사문(実力査問)에 걸린 여학생이, 찢어진 속옷차림으로 문학부의 지하실에서 나오는 모습 등을 보았다. 그러한 시대에 나의 <청춘>은 막을 올리고, 그리고 무척이나 울적한 게 끊이지 않고 달라붙어있었던 것이다.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싫은 느낌이 끓어올라, 썩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거나 산뜻하게 서정적으로 스케치해 보이는 수밖에 그 시대를 이야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허나, 언젠가는 글 짓는 사람으로서 그 짓누르는 괴로움의 정체를 확실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한밤중에 문득 눈이 떠져, 멀리 달리는 말발굽소리 같은 걸 듣는 때가 있다.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도 모르고, 환청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나의 기억으로부터 되돌리고 싶은 그 시대의 무거운 발소리와 같아 못 견디겠다는 거다.
( 地図のない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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