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하라마사아키(立原正秋)의 수필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지금이야말로 : 다치하라마사아키(立原正秋)
「자신 찾기」 라는 식으로 말하면 차가운 시선을 모으지 않을까 싶은 작금인데, 덧없는 세상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 하는 건 인생의 영원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신 찾기 끝에, 「자신 만들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생을 꿰뚫어보면서 소설을 남긴 게 다치하라마사아키였다.
쇼와40~50년대, 「남겨진 눈(残りの雪)」 「봄의 종(春の鐘)」 「그해 겨울(その年の冬)」등으로 전통미가 남아있는 고도를 무대로, 중년남성과 나이 차이 나는 여인과의 어쩔 수 없는 성애를 그려 유행작가가 되었다. 수필에서는 스스로 식칼을 드는 식도락가라던가, 골동을 사랑하여 4계의 꽃과 풀에 눈을 돌리는 모습을 피로해, 여성 독자도 당연히 많은 가운데 남성에 있어서도 교양 넘치는 미의식에 철저한 작자와 작중인물의 늠름한 모습에 동경을 안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것이 아니었다. 1978년의 수상 「변하지 않는 것과 30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세계대전 말기, 나는 초연이 감도는 고공을 올려다보면서,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망할 것을 절실하게 바랐다. 그 이외에 믿어야할 것이 없었다. 나의 전후는 거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까지 여생을 살아왔다 (생략) 라고 해도, 아무렇게나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다」。
다치하라는 생애에 여섯 개의 이름을 가졌다. 필명인 다치하라마사아키(立原正秋)가 본명이 된 건 사망하기 1개월 정도 전. 식민지 아래 조선에서 태어났을 때는 김윤규(金胤奎). 부친의 사망과 함께 9살에 도일하고부터는 창씨개명 등으로 이름이 계속 바뀌었다. 전후 48년,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아내의 호적에 들어가는 형태로 일본국적 취득. 다음 달, 조선분단이 결정된다.
그러잖아도 자아가 흔들리는 청년기, 다치하라는 고바야시히데오(小林秀雄)의 「자네모토(実朝)」를 계기로, 무상관(無常観)과 함께 일본의 중세문화에 심취하게 된다. 1968년에 쓴 문장에 한 종류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제아미(世阿弥)는 구도자이기는 했어도, 그는 미, 다시 말해 꽃밖에 믿지 않았다. 이 난세에 믿을 수 있는 건 아름다움밖에 없다」(「가덴쇼(花伝書)」의 가르침」) 「조선의 피를 이어 태어났으면서, 전후, 일본인으로 살아갈 각오를 했다. 이른바, 중세문화를 혈육으로 함으로써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을 만들고자 한 건 아닐는지」 라고 작가인 다까이유이치(高井有一)씨는 말한다. 다치하라의 생전부터 동인지활동 등으로 깊이 사귀면서, 사망 후에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평전을 썼다.
「출신에 대해 밝히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한편, 소설의 무대장치일듯한 일본의 미의식을 실생활에서도 집어넣어간다. 스스로의 감성에 맞는지 어떤지 흑백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적도 많았다. 다만 그의 철저한 태도가 작품의 질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자신 만들기」로부터 탄생된 다치하라 문학에 대해, 「원래 삶이라는 걸 덧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불태우려고 합니다.」 라고 표현한 건 작가인 요시모토바나나(吉元ばなな)씨다. 대학시절、「연인들」과 속편 「하마시기」를 읽고, 끌리게 되었다. 가마쿠라를 무대로, 성격이 다른 세쌍둥이의 파란 많은 인생과 복잡한 연애모양이 전개되는 청춘 군상 소설이다.
「사는 법 같은 것을 설득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쌍둥이도 그들과 연관되는 여성등도 사진의 미학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흑백을 확실하게 하면서 똑바로。현재 마음의 흔들림에 혼란스러운 젊은이야말로 읽었으면 한다.」
「남겨진 눈」과 같은 후기의 다치하라 작품은 「변해가는 세상」 「변하지 않는 미」 「성과 생이 번쩍이는 순간」과 같은 삼위일체와, 각각의 대비가 선명함을 더한다. 자신 만들기의 끝에 만들어 내는 문학이 어떻게 숙성하는가. 답을 내지 않은 채, 54세로 사망했다.
今こそ - 立原正秋
「自分探し」などと発すれば冷ややかな視線を集めかねない昨今だが、浮世のどこに拠(よりどころ)を構えるかは人生の永遠の課題でもある。 そんな自分探しの果て、「自分作り」とも言える人生を透徹し、小説を残したのが立原正秋だった。
昭和40~50年代、「残りの雪」 「春の鐘」 「その年の冬」などで、伝統美の残る古都を舞台に、中年男と年の離れた女とのわりなき性愛を描き、流行作家になった。 随筆では自ら包丁を握る食通ぶりや、骨董を愛で四季の草花に目を配る姿を披露。女性読者の多さもむべなるなかで、男性にとっても、教養にあふれ美意識に貫かれた作者と作中人物の凛とした姿に憧れを抱いた人も多かっただろう。
だがそれは、自然と身についたものではなかった。1978年の随想「移ろわぬものと三十年」に、こう記す。
「大戦末期、私は、硝煙の匂う高空を見上げ、日本が滅び朝鮮が滅ぶことを切にねがった。それ以外に信じられるものがなかった。私の戦後はそこから出発している。したがって、今日まで余生を生きてきた(略)といっても、いいかげんな生きかたをしてきたわけではない」。
立原は生涯六つの名前を持った。筆名の立原正秋が本名となったのは亡くなる1か月余り前。植民地下の朝鮮で生れた際は金胤奎(김윤규).父の死に伴い九歳で渡日してからは、創氏改名などで名前が変り続けた。戦後の48年、婚姻届を出すため、妻の戸籍に入る形で日本国籍取得.
翌月, 朝鮮分斷が決定的になる。
ただでさえ自我が揺らぐ青年期、立原は小林秀雄「実朝(さねとも)」を契機に、無常観を伴う日本の中世文化に傾倒していく。68年に書かれた一文に、ある種の覚悟がうかがえる。
「世阿弥は求道者ではあったが、彼は美、つまり花しか信じなかった。この乱世に信じられるのは美しかない」(「花伝書」の教え」)「朝鮮の血をひいて生れながら、戦後、日本人として生きる覚悟をした。いわば、中世文化を血肉とすることで日本人としての自分を作ろうとしたのではないか」と作家の高井有一さんは話す、立原の生き前から同人誌活動などで深くつきあい、没後に決定版ともいえる評伝を書いた。
「出自についてあからさまにすることを避けていた。一方、小説の舞台装置であるはずの日本の美意識を実生活にも取り入れていく。自らの感性にあうかどうか白黒はっきりさせるため敵も多かった。
ただその徹底した態度が、作品の質にもつながっている。
そんな「自分作り」から生れた立原文学について、「もともと生きるということを空しく思うものが、それでもどうにかして生命をもやそうとしてします」とひょうげんしたのはさっかの吉元ばななさんだ。大学時代、「恋人たし」と続編「はましぎ」を読み、ひかれていった。鎌倉を舞台に、性格の異なる三つ子の波乱の人生と複雑な恋愛模様が展開する青春群像小説だ。
「生き方みたいなものを説かれている気がしました。三つ子も彼らに関わる女性たちも自分の美学にのっとって行動する。極端な行動に見えるかも知れないけれど、白黒はっきりさせてまっすぐに。いま、心の揺れに惑わされている若い人こそ読んで欲しい」
「残りの行き」のような後期の立原作品は「移ろう浮世」 「移ろわぬ美」 「性と生がきらめく瞬間」という三位一体と、それぞれの対比が鮮やかさを増す。自分作りの果てに生み出す文学がどう熟成するのか。答えを出さないまま、54歳で逝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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