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養蚕說:양잠설 ー 尹五榮:윤오영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養蚕說    尹五榮

とある農家一晩過ごしたことがある. 月明かりがまぶしいのに何処かで雨降こえる. ねるとりの部屋という. 数多くのいつつしゃきしゃきと桑葉がまるで雨降. 食慾旺盛であるがためだろう.

この時期には充分えねばならない. 数日間食けると体内脂肪質充実してそれが皮膚緊張させやかな飴色びるようになる. そのから食慾ちるのだがこれを催眼期. やがてついに斷食してしまう. そしてきつつ自分固定させだけこしてりにちる. これを一眠りするという. それからもなく脫皮をもたげるがこれをという. この体質極度えるので注意して保護せねばならない.

べはじめる. じだ. 過程しつつ催眼, 脫皮, する. これを 一齡, 二齡または一眠二眠りしたいう. 五齡になるとりそのもる. この成家という. これが共販場特等, 一等, 二等, 三等, 等外品評価されるのだ.

はこのきながら人間文章るのとじだとった. もが一時文学少年期えるこの時期には讀書熱旺盛になりすべてのことがきれいに. このよりくのまねばならない. それにって抱負りなくがりはこよなく. この時期には優秀作文れる.

だがなくして思索にこもり懷疑るのだ. 文學書でもさほど淸新じれなくなる. この現実目覚めて々が自分行方したりしながら哲學宗敎書籍. そしてひたすら沈鬱思索. 催眼期れるのだ. ぐっすりったをもたげながら. 脫皮.

一段くなったのだ. 人生探究する境地したわけだ. しかしながら精神的には極度衰弱期である. 作品はひたすら反抗苦悶忌避身悶えしている. こんな時期えれずそのけれず立向かいざまれてしまうるが夭死した天才もたまにはいる.

もう一度文耽讀める. 二齡ったのだ. 何度もこの瀬戸際かい脫皮しつつ自己完成. その途中えきれない程脱落者. 最後自己力量のすべてをつにしてめつつとし, 自分なりの世界安住する. って成家した作家である. はじめてこの作品大小により一等品, 二等品として後世評價対象となる.

大概人間一生六十一期とみれば二十代一齡期, 三十代二齡期, 四十代三齡期, 五十代四齡期, 六十代五齡期にあたる. もうきかろうがさかろうが自分世界安住せねばないである. ついにから絹糸めるのだ. べてこなしたのだからなく鼓舞脫皮しつつった(境地)だからこそげるのだ. 七十でも九十でもまで確固たる自分境地自分自分べねばならない. ここで二十代六十代えてしたのは勿論肉體的年齡ったのではない. 肉體的年齡對比するのがわかりいとったからだ. 優秀文學家生活濃度精力神秘一般超越する. それこの年齢千差萬別短縮される.

われわれは他人んだのようにずることがしばしばある

 "あのれるが, ." べたないということだ. 讀書不足言葉である

 "あの博識だが才能りない." りがかったとのことで思索不足批判整理出来なかったのを 

"あのはたっぷりんだことはかだがかがりない." 一度だけしかべていない. 読書期一回わったということだ

 "學識才質充分だがさい." 四齡までけなかったとのことだ.  "あのだにとせなかったとえる.

" 五齡期たせ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 自分たせなかったのだ 

"あのりない努力家. 大元老. しかしたいしたことはなさそうだ." . てれないんだいが 

"あの大家だよ. すばらしい文章だが妙境にはらない." れなかったとのことだ. 一家完成させなかったのだ.

養蠶家から文章論んだ.

 

양잠설  ─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을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여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 때의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안,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 이령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한 때는 문학소년시절을 거친다. 이 때에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하게 머리 속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 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 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 서적들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한 사색에 잠긴다. 최안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피에 몸부림친다. 이 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이령(二齡)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한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탈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成家)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이등품으로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一期)로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기요, 삼십대가 이령기요, 사십대가 삼령기요, 오십대가 사령기요, 육십대가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 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 만큼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며 지어 논 고치(境地)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 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은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까지 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아." 오령기를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 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大家.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