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街路燈 - 朴木月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街路燈が好きになるのはやっぱり冬季だろう. 牡丹雪が降りまくる夜, 吹雪のなかで仰ぐあかり, それは, われらの憧れの感情が届く丁度良い所にぽつんと点っている夢のあかりである。
あかりの点った街路燈の柱にそっと寄りかかって果てしない瞑想にふける孤獨, それは私の若き日の涙ぐましい姿だった.
しかし今は雪降る夜街路燈に寄りかかる孤獨なロマンなど忘れ失って久しい. それは私の年齡のためだけでは無さそうだ. おそらく人間は歳を重ねるにつれてひとしお孤獨になり, それで雪降る夜は一層わびしくなるのだろう. しかしながら私が孤獨なロマンを感じれない理由は世相によるものと思われてならない. 終戦後からわれらはロマンの夜を失った. あの生暖かい夜のあてどないそぞろ歩きを通行禁止という法が塞いだ. 十一時のサイレンが鳴るとすでに夜は自分のものではなくなる. 市廳前の街路燈はがらんとしたわびしい広場をそっと点すあかりになってしまうのだ. 通行禁止時間中、街道に並ぶ街路燈のあの惨たらしい姿や淋しいあかり. そうだ. われらの生活は安寧秩序のため夜を真っ暗な闇として迎えねばならなかった.
アンデルセン童話に「古い街路燈」という作品がある. 毎夜街路燈をじっと見つめる額の広い靑年の話で始まる作品だ. 街路燈はその夢多き青年の白い額に, あかりの淋しい口づけと「わびしい祝福」を注ぐ. 私はこの童話を読みつつ, 青年の額に注がれる街路燈のわびしいあかりが灯りというよりは却って「神の寛大な祝福」であり,「自分の生が自分自身に注ぐ明り」のようだと思った.
私は自分の果てしない人生旅路の節目ごとにわびしい街路燈でも点されることを祈った. 実際, 街路燈を遠くで眺める時は, それが未來の一点をほんのり灯す星明かりのように思えた. 私は街路燈を目指して暗い道を, ひとつの地點から他の地點まで行かねばならない.
その街路燈近くまで行けば, より道程が明るくなり, 時には私が目指す街路燈へ虫のようにときめく牡丹雪が, 面白く歌う花房が, 一つのさやのように引っ掛かったり, または, または, 細い霧雨が絹のベールを掛けながら神秘的にささやき, または, ただ闇の中で灯火だけちょこんと点されている. しかしその目指す街路燈を通りすぎると私の陰をまず足が踏んでしまう. その踏まれた陰を何と表現すれば良いだろう. 涙ぐましい追憶の一欠片が踏まれたと言えようか. 私は暗くて孤獨な夜道を街路燈だけが照らしてくれるたったそれだけの映像になる. それこそこの世を渡る己れの姿であるような気がする. この心暖まる孤獨感, 私の生の心底を流れる「悲しみの波」なんだ. この波の上に船を浮かべるようにつまらない数編の詩を, それが私の息づく詩の世界であろう.
かような街路燈のあかりの回りから完全に離れると私は目前の漠然とした暗黑の壁を再び感じつつ, 限りない暗闇の道でもう一つの街路燈を探すのである. しかし, どれほど探しても街路燈が見つからない場合, 限りない闇は永遠の闇になってしまう. これが「私の最後」であろう.
私の一生はいつも適当な距離に街路燈が点っている道だ. そして通って来た路上にそれは列を成してずっと並び. スクリーンの, とある一つの場面のように限りなく延びている. また私の未來も. たとえ絶望に至ったとしても. ずっと街路燈が角ごとに点っている道であろう. 私の心の中の神を失わない限り, または詩を逃さない限り, 間違いなく私は. たまには蒼白な額に街路燈のあの寂しい灯りの口付と祝福を受けつつ. わびしいながらも心暖まる夜道を歩くだろう.
街路燈に祝福を.
가로등/박목월
가로등이 좋아지는 것은 역시 겨울철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 설레는 눈발 속에 우러러 보는 등불,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닿을 수 있는 동경의 알맞은 위치에 외롭게 켜 있는 꿈의 등불이다. 그 등불이 켜진 가로등 기둥에 호젓이 기대 서서 가없는 명상에 잠시 잠겨보는 고독, 그것은 나의 젊은 날의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은 눈오는 밤 가로등에 기대 보는 그런 고독한 낭만조차 잃은 지 오래다. 그것은 나의 연령의 탓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나이가 들수록 한결 고독한 것이며, 그래서 눈이 오는 밤은 한결 유감해지는 것이리라. 다만 내가 고독한 낭만을 못 가지는 것은 세태의 탓일 것이다. 해방 후로 우리는 낭만의 밤을 잃은 것이다. 그 포근한 밤의 지향없는 소요을 통행금지라는 법이 막고 있는 것이다. 열한 시 사이렌이 불고 나면, 이미 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청 앞길의 가로등은 다만 텅 빈 적적한 광장을 외롭게 비치는 고독한 등불이 되는 것이다. 통행 금지 시간 넘어 거리에 선 가로등의 그 처참한 모습과 쓸쓸한 불빛. 그렇다. 우리의 생활에는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밤을 완전히 어둠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늙은 가로등'이라는 작품이 있다. 밤이면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마가 넓은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가로등은 그 꿈 많은 청년의 허연 이마에 그의 불빛의 쓸쓸한 키스와 또한 '쓸쓸한 축복'을 부어 주었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 젊은 청년의 이마에 비쳐주는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이 불빛이기보다 오히려 '신의 너그러운 축복'이요, '내 삶이 내게 비쳐주는 빛' 같았다.
나는 나의 멀고 아득한 인생 여로의 대목마다 외로운 가로등이 켜 있기를 빌었다. 참으로 가로등을 멀리 바라볼 때, 그것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은은히 비치는 별빛이다. 나는 가로등을 목표로 해서 어두운 길을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그 가로등 가까이 가면 한결 길이 환해지고, 때로는 내가 목표한 가로등에 벌레처럼 설레이는 함박눈이 이상하게 노래하는 꽃송이가 한 꼬투리처럼 걸리기도 하고, 또는 가는 실비가 비단 베일을 씌우며 신비롭게 속삭이기도 하고, 혹은 다만 어둠 속에 등불만 쫑긋이 켜 있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그 목표한 가로등을 지나면, 우선 나의 그림자기 발에 밟힌다. 그 그림자가 밟히는 사실을 나는 무어라고 표현할까? 눈물겨운 추억의 한 자락이 밟히는 것이라 할까? 나는 이 어둡고 고독한 밤길에 다만 가로등이 비쳐주는 다만 그만큼의 '빛의 둘레' 속에 나의 그림자와 더불어 호젓이 길을 걷는 한갓 영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건너가는 나 자신 바로 그것의 모습 같은 생각이 든다. 그 흐믓한 고독감, 나의 삶의 가장 밑바닥을 흐르는 '서러움의 물결'이다. 이 물길 위에 배를 띄우듯 어줍잖은 몇 편의 시, 그것이 나의 숨쉬는 시의 세계일 것이다.
기로등의 이러한 빛의 둘레를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앞이 아득한 암흑의 벽을 다시 느끼며, 끝없이 아득한 어두운 길에 또 하나의 가로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로등이 없을 경우, 아득한 어둠은 영원한 어둠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이다.
나의 일생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 가로등이 켜 있는 길이다. 그리고, 지나온 길 위에 그것은 나란히 열을 지어서 스크린의 어느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뻗쳤다. 또한 나의 미래도 설사 아무리 절망하기로니, 늘 가로등이 대목마다 켜 있는 길일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신을 잃지 않는 한, 혹은 시를 놓치지 않는 한, 그래서 나는 때때로 창백한 이마에 가로등의 그 쓸쓸한 불빛의 키스와 축복을 받으며, 외롭게 흐믓한 밤길을 갈 것이다. 가로등에 축복이 있기를.
'번역 [飜譯] > 韓日飜譯 [한일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poem] 윤보영님의 시 두편 (0) | 2015.03.20 |
---|---|
[poem] 봄을 기다리면서.... (0) | 2015.02.14 |
[poem] 김춘수님의 시 3편을 번역해보았습니다 (0) | 2015.01.25 |
[poem] 세월이 가면 : 박인환 (0) | 2015.01.06 |
[poem] 겨울 맞이 시 3편 번역해봅니다 (0) | 2014.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