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워프의 선물 -스기모토 타케시 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앤트워프의 선물
1984년 여름, 암스텔담에서 시작하여 마스트리히트, 룩셈브르그, 나뮤르, 브루쥬 등 명화와 사적을 찾아다니는 베네룩스 3국 여행도 이제 거의 끝나, 앞으로 며칠을 남기고 있었다.
여행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나면, 여행을 했던 해는 커다랗게 부풀어 풍성한 추억거리로서 오래도록 충족시켜준다.
호텔 방에서, 결혼 피로연을 기다릴 때 나오는 벚꽃물을 떠올린다. 시들어 형태조차 없는 절인 벚꽃 잎이 더운 물을 부었을 때 멋지게 색과 향을 재현하면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여행의 추억은 바로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느낌으로 가끔씩 떠오르는게 안트워크의 하루이다.

그날은 전에 약속한 M씨의 안트워프 저택을 방문하기 위해 한 호텔 로비에서 꼭 들려달라던 그와 상봉을 하였다. 앤트워프라고 하면 와그너의 「로엔그린」이 떠오르는데, 실제 거리는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커피잔을 비우고 나서 얼마 후
「미안합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하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난 인사를 나누자 가까이에서 기다리는 주인의 차로 안내되었다. 남편인 카메라맨 G씨와는 도쿄에서 만난 후 2년만인가보다. 거리를 달리면서 간단히 가이드를 해 준다. 그의 프랑스어와, 그녀와 나의 일본어로 차 안은 시끌시끌했다. 차는 이윽고 두사람의 주거지로 향했다. 중심부에서 겨우 20분 거리로 조용한 주택가였다.

꽃이 만발한 정원 안쪽에 백아의 세련된 건물이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넓은 부지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옆집은 높은 수목에 가려 보이지 않고, 마치 앉아서 삼림욕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2대 놓여있는 거실을 빠져나오자 넓은 잔디밭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고, 커다란 파라솔이 적당히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잔디밭에 나갔다. 주인의 안내를 따라 왼편 좁은 길로 들어서니 깊숙한 곳에 놀랍게도 닭장이 있었다. 달걀의 흰색이 눈부셨다. 그 옆으로는 닭의 산책길까지 있었다. 그 너머 왼쪽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너머에는 일본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대나무숲이 있었다.
잔디밭으로 돌아와 길게 누우니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언뜻 며칠 전에 고호 미술관에서 본 삼나무 그림이 포개진다. 그러고 보니 고호가 태어난 곳이 네덜란드이고, 아마도 여기서 얼마 안되는 곳일 것이다. 앤트워프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을 때 잠시동안이지만 살았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앤트워프라고 하면 물론 루벤스가 유명하지만, 네덜란드를 먼저 돌고 온 탓일까, 왠지 고호가 자꾸 떠오른다.

여행 이야기, 성 이야기 등 이야기꽃이 피는 동안 요리도 완성 된듯, 그가 자랑하는 지하 와인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오래된 와인을 들고 왔다. 이 날을 위해 이것이면 하고 그가 골라낸 한병. 우선 백포도주로 건배! 과연 맛있다. 와인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는 기분좋은 소리. 그녀가 손수 만든 따끈따끈한 가리비의 코키르가 나왔다. 피아니스트인 그녀의 요리는 물론 처음인데, 맛은 손색없었다. 다음은 교대해서 주인인 G씨가 구운 스테이크. 74년산의 풍미로운 와인이 배어있어 일미였다. 와인을 한잔 더 받았다.
일본에서 수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본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느긋한 기분으로 받아보는 따스한 우정, 가슴이 뜨거워진다. 좁은 국토에서 몇번이나 반복된 전화(戰火)의 시련을 견디어내며 쌓아올린 역사의 산물인가, 두개의 민족과 언어를 훌륭히 통합하여 벨지움은 이제 EC 가운데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길러진 커다란 포용력이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일까?

정원에 눈을 돌려보니 풀의 파아란 물이 내리쬐는 태양빛을 그대로 흰 벽에 반사시키고 있었다. 이런 것을 물의 유혹이라고 하는가? 풀 사이드의 통나무 오두막. 그곳에는 잔디깎는 기계를 비롯해서 밭일하는 도구 일체가 있고, 샤워실까지 있었다. 그 곳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에 뛰어들었다. 수온은 피부에 알맞은 온도로 조종되어 있어 여행의 피로가 단숨에 날아갔다. 그도 어느틈에 물속에 들어왔다. 물은 청정기가 게처럼 물바닥을 움직이고 있어서인가 맑고 깨끗했다.
풀에서 올라와 테라스에 돌아오자 뜻하지 않은 사람이 방문을 했다. 피아노 시인 프랑스와 그로류씨였다. 절묘한 터치로 바하를 재즈풍으로, 혹은 재즈를 모차르트풍으로,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일본에도 몇번 온적이 있다. 도쿄에서 듣고 그 음에 취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G씨와는 전우 사이로, 오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었는데, 근처 슈퍼에서 딱 마주쳐 이 근방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의 해후로 나를 놀라게 만들려는 그녀의 계획이었다. 「도쿄에서 닥터가 와 있어요」라는 전화를 듣고 달려왔다는 것이다. 늦게 본 두살박이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귀여워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람의 출현으로 또다시 도쿄 이야기, 여행 이야기등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돌아와 그녀의 스카르라티를 듣는다. 연주회장에서 듣는것과는 달리, 얼마나 부드러운 울림인가! 마음의 주름 속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몇사람의 귀에 닿으면 이제 사라진들 어떤가. 피아노의 긴 역사 가운데 대부분은 살롱에서 몇사람을 위해 연주되지 않았을까? 소리에 취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끝나자 그로류씨가 「닥터에게 선물이 있소」라고 한다. 무엇일까? 일어서서 피아노로 향한다. 뭔가 멋진 소리인데, 무슨 곡인지 금방은 알 수가 없었다. 들어보지 못한 곡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피아노를 치면서 미소짓는다. 겨우 알아차렸다. 이건 일본의 「키타노 야도카라」가 아닌가. 작곡가이기도 하고 지휘자이기도 한 그의 손에 걸리면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 되는 것이다! 소리를 언어로 표현하려는 답답함. 일본에도 이렇게 멋진 음악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1987년 12월)

* 에든버러 단상
이제는 고인이 된 모치다노부오(持田信夫)씨의 사진집에 [스코틀랜드 풍물시]라는 책이 있다. ‘눈부신 자연과 중세로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10년전에 발행된 책이다. 저자는 모치다제약의 사장이었던 분이다. 사진에 곁들여진 문장도 한 맛이 나의 2년전 스코틀랜드 여행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또한 지금은 지난 여행의 나날들을 되돌아보는 귀중한 한권이 되었다.
음악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허구헌날 너무 듣고 보고 하여 그 옛날의 감동을 잃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재작년의 스코틀랜드 여행에서는 뜻밖의 장소에서 음악에 의해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은 일이 있다. 그 전후 사정을 모치다씨의 책을 앞에 두고 적어보고자 한다.

내일은 기다리던 세인트 앤드류스에서의 골프가 있어, 그날 밤 행사에는 별로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날 밤의 행사란 에든버러의 마지막 여름을 장식하는 국제음악제와 함께 개최되는 ‘밀리터리 태투’였다. 에딘버러성 입구의 에스프라네이드 광장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백파이프 밴드의 일대향연이라는 것이다.
밤 아홉시 시작이어서 모처럼의 요리점 ‘하우 타우디’의 영국요리도 느긋하게 음미할 수 없다. 밖으로 나오니 달갑잖은 비였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듯 바위 위에 쌓아올린 에딘버러성으로의 포석 언덕을 오른다. 과연 고지대에서 수비하기에는 딱알맞은 요새였다. 광장을 둘러싸고 양측과 정면을 바라보는 곳에 가설스탠드가 마련되어있다. 우산은 금지라고 하여 우비를 입고 자리에 앉았다.

에든버러성은 낮의 어두침침한 모습과는 딴판으로, 비구름의 암흑을 배경으로 밝은 라이트를 받아 가히 황금의 성 그자체였다. 비바람에 펄럭이는 3개의 깃발을 올려다보는데, 드디어 정면 성 안으로부터 웅장한 마치와 함께 군악대가 등장했다. 그리고 터턴체크 퀼트 모습의 백파이프 밴드가 뒤를 이었다. 차례차례 쏟아져나오는 대열로 그 큰 광장이 가득 메워지고, ‘성조기여 영원히’ 등 잘 알려진 곡 혹은 모르는 곡 등이 비를 튕겨내듯 울려퍼졌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패전한 날, 8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40여년 뒤인 이 밤, 한때는 적국이었던 곳에서 이러한 마치를 듣고 있자니 형용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이 자랑스러운 스코틀랜드의 카란(씨족)도 한 때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 패한 사람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곡이 귓속으로 뛰어들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의 유명한 합창, ‘가자, 우리의 꿈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가 아닌가. 비바람으로 8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추위에 움츠러들려는 몸에 감동이 퍼저나갔다. 이태리에서는 제2의 국가라고 일컬을 정도로 애창된다는 곡이다. 이곳은 이태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석을 메우고 있는 비바람 속의 청중을 끌어안고, 둘러싼 무거운 공기를 뒤흔들며 울려 퍼진다. 잡혀가는 헤브리인들이 그 슬픔과 희망을 노래하는 합창으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시달리던 이태리인들을 분기시키면서 이태리민중이 애창하게 된 곡인 것이다. 내 망막에 1988년, 리카르도 무티가 이끄는 밀라노 스칼라좌의 일본공연에서 있었던 [나부코] 무대가 겹치면서 다가왔다.
그칠줄 모르는 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사람 우산을 받고 있지 않았다. 추위를 떨치듯 합창에 동참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시간이 멈추는 듯한 한때였다. 호텔에 돌아와서 우선 바에 들러 스탠드에서 본고장 스카치를 좀처럼 마시지 않는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오랜만의 스트레이트는 부드럽게 혀를 지나 메마른 목을 단숨에 소생시켜준다. 가슴에 복받쳐있던 [나부코]의 감동이 조용히 차디찬 손발 구석구석까지 흐르면서 따뜻하게 해주었다. (1991년 5월)

요코하마에서 와그너를 듣다
그날, 1987년 10월 22일, 야마시타공원에 면한 현민(縣民)홀 앞 광장에는 기다란 베를린독일오페라 깃발이 바닷바람에 날리면서 와그너의 ‘니베른의 반지’ 개연을 알리고 있었다. 개막날 밤의 ‘라인의 황금’ 첫날밤의 ‘와르큐레’를 마치고 오늘밤은 둘째날밤의 ‘지그프리드’이다.
이번 티켓구입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반년전에 나흘밤 세트권을 먼저 팔기 시작했는데, 1회가 5시간에 이르러, 일을 쉬면서 나흘밤을 갈 수는 없는 일, 요일을 선택하여 두번만 가기로 하고 아침부터 신청 전화를 걸었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겨우 연결되어 문의하니 이미 판매완료였다. 도쿄에 없다면 할 수 없다. 제1사이클의 요코하마는 어떤가 물었더니 조금 남았다고 하여 겨우 살 수가 있었다. 약간 멀지만 바이로이트까지 갈 일을 생각하면 대단한 거리는 아니다.
티켓이 손에 들어왔으니 다음 일은 예습이다. 레이저디스크나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면 더할나위 없지만 그 어느쪽도 없었다. CD는 다양하게 있어 망설이다가 결국 크나파츠부슈의 전곡 15장을 샀다. 싸지는 않았으나 골프 2회분이라고 스스로 달랜다. 그 밖에 몇권의 책, 이렇게 재료를 갖추었다. 다음은 카 스테레오용 테이프 작성이다. 일주일정도로 완성하여 일부를 차에 넣었다. 이것으로 거실, 서제, 침실, 차 속, 어디서나 즉각 ‘반지’이다. 우선 서장의 ‘라인의 황금’부터 듣기 시작했다. 자나깨나 와그너의 나날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와그너를 듣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나 돌이켜본다. 가곡을 중심으로 슈베르트를, 쿼테트를 축으로 베토벤을, 기악곡에서부터 칸타타까지 폭넓은 바하, 피아노 협주곡에서 오페라까지의 모차르트 등 각각 교착된 십수년을 쌓은 뒤에 와그너를 자주 듣기 시작한 건 지난 7,8년이다. ‘탄호이저’ ‘뉴른베르그의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 등 꼽자면 끝이 없는데, 특별히 나를 와그너광으로 만든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이렇게 해서 주위에는 늘 와그너의 음악이 넘치고, 화제의 ‘반지’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져갔던 것이다.
게다가, 1980년에 방문한 노이슈반슈타인성, 3년전 베를린에서의 국제학회 귀도길에 방문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과 반프리트관, 그 뒤의 와그너와 코지마의 묘, 그리고 작년에 방문한 린더호프, 그 하나하나가 내 안에서 와그너의 존재를 크게 만들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 약간 여유있게 2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예전에 곧잘 탔던 토요코선(東橫線)으로 사쿠라기쵸(櫻木町)에 닿았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여 다이잔쿄 근처의 오래된 커피샵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가라앉혔다. 와그너를 들으면서 보는 건 체력과의 승부이기도 하다. 창밖의 석축건물은 이국정서를 자아내고 있어 도쿄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였다. 에스프레소로 한숨을 돌린 다음 가까운 거리의 회장에 도착하자 입구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들여다보니 열명 정도의 연주자가 손에손에 트럼펫을 들고 늘어서있다. ‘니베른의 반지’ 개연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금관의 와그너 특유의 화음이 사방의 공기를 뒤흔들면서 야마시타공원의 나무들을 뚫고 바다로 빠지고 있었다.

오후 4시반, 드디어 개연이었다. 게츠 프리드리히 연출, 코보스 지휘에 그네 코로의 지그프리트, 리겐츠아의 브륜히르데 라는 최고의 포진이었다. 숲속 바위집의 제1막은 지그프리트가 부러진 검을 고쳐 만들기까지의 이야기. 대화가 많은 오페라인데 자막이나 이어폰이 없어 답답한 장면도 있었으나 음악과 움직임이 그것을 메워주고 있어 지루하지 않다.  또한 이어폰이 없기 때문에 귀를 막지않아도 되 멋진 음악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80분의 제1막이 끝나자 어두워지는 항구에 깜빡이는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제2막은 숲속의 큰 뱀동굴 앞. 르네 코로의 ‘숲의 속삭임’이 기막히다. 무대를 거대한 터널 속에 설치한 의도도 차츰 알게된다. 처음이 끝나고 끝이 시작되는, 이른바 윤회이다. 바보같은 싸움을 되풀이하는 인간에 대한 비웃음인가 절망인가.
제3막. 세계 지배의 계약이 새겨져있는 보탄의 창을 두조각낸 지그프리트는 불길을 넘어 바위산에 들어가고, 잠자는 브륜히르데를 깨워 사랑의 이중창을 노래한다. 감동의 5시간이었다.
중간에 이틀을 두고 25일 일요일, 사흘째 밤, ‘신들의 황혼’을 듣기 위해 또다시 요코하마에 갔다. 붉은 밧줄을 당기는 처녀들의 노래로 시작되어 ‘지그프리트의 라인 여행’ 에서 ‘장송행진곡’, 그리고 ‘브륜히르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긴박감과 장대함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언어에 의한 표현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다 듣고 난 다음 열기 넘치는 회장을 나서자 함구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상큼하다. 다행히 바로 앞에 언젠가 온적이 있는 오래된 호텔 바가 있었다. 현실 세계로 금방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분에 한동안을 보냈다.
반지를 본지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늬때 같으면 무대를 보고난 다음 정리해버릴 CD와 테이프를 지금도 그 자리에 두고 듣고 있으나 질리지 않는다.
한편 요코하마로 와그너를 들으러 갔었기 때문에 와그너뿐만 아니라, 장소 역시 요코하마가 아니라 쿠사츠이던 가스가토게이던 듣고싶은 것이 있을 때는 거기까지 가면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는 게 커다란 수확이었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개막날과 첫날을 보지못한 것이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1988년 6월 7일)

히로세 강변에서 아크힐즈 까지
음악이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관련이 되든지 사람과의 만남을 별도로 한다면 그 사람 인생에 얼마만큼 풍부한 [결실]을 가져다주는가 짐작도 못하는 일이 아닐는지.
나의 경우, 센다이(仙臺)에서 보낸 청춘시대로부터, 히비야, 우에노 그리고 아크힐즈 산토리홀의 현재까지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라는 보석이 하나가득 연결되어 더할나위 없는 보물이 되었다. 그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말하자면 클래식 샹송 재즈 요쿄쿠(謠曲) 코우타(小唄) 오페라이고, 클래식을 다시 내 안의 세월의 흐름으로 보자면 슈베르트 쇼팽 베토벤 브람스 슈만 포레 바하 모차르트 슈츠 베르디 양슈트라우스 그리고 와그너의 순으로 연결된다.
키타나나반쵸(北七番丁)라는 거리 이름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 근처에 나의 음악편력을 시작하게 한 장소가 있다. 옛날 센다이중학 1,2학년쯤이었을 때, 내과의인 숙부의 집이 근처에 있어 그곳에서 손으로 돌리는 포터블 축음기를 들었던게 생생즈의 ‘백조’였고, 멘들즈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이었다. 이런 센다이에서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후의 음악과의 만남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중학생의 용돈으로는 살 엄두도 못 낼 갖가지 레코드를 차례로 들을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베토벤의 ‘제5’ ‘크로이첼’ 멘델스존의 ‘이태리교향곡’ 등등 모두가 숙부의 소장품이었다.
더욱이 힛슈가 노래한 ‘겨울 나그네’는 그 후 구제 2고시절에 걸쳐 내개는 성서와 같은 존재였다. 그 몇년후 히로세 강기슭에 세워진 공회당에서 일본에 온 힛슈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될줄이야. 게다가 20여년 뒤에 뮨헨을 방문하여 그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구제 2고 시절은 대학병원 옆 키타고반쵸(北 五番丁)의 하숙에서 오로지 바하의 무반주체로소나타를 카잘스연주 SP로 듣고 있었다. 패전 후 얼마 안되었을 때여서 식료품도 귀하고 레코드점에서도 취급하는 건 중고품으로, 에레나 게르하르트, 롯테 레만 등의 노래, 부슈, 레나, 카베 등의 쿼테트를 들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3년 선배인 쇼지(庄司)가 문화제 때 이와모토마리(巖本眞理)를 데리고 와서 멋진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운 추억이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외국 연주가의 방일이 활발해져, 하숙이 있었던 야하타쵸(八幡町)로부터 賣茶翁 앞의 공회당으로 헬렌 트라벨, 앞서 말한 게르하르트 흇슈 등을 들으러 가 생음악을 접하면서 음악의 황홀함에 감격했다. 샹송의 다미아도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앙코르 뒤에 사인을 받으면서, 갓 배우기 시작한 불어로 이야기를 걸자 두꺼운 만년필을 들고 있던 커다란 손을 멈추고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 후 도쿄로 자리를 옮긴지 34년, 센다이에서도 가끔 찾아왔던 히비야공회당을 비롯하여 우에노 문화회관, NHK홀, 메지로의 카테드랄에서 아크힐즈의 산토리홀까지 편력은 이어진다.
본격적인 오페라 극장이 아직 하나도 없는 것은 유감이나 앞다투어 찾아주는 외래 음악가들 덕택에 오페라를 비롯 대응에 여념이 없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산토리홀에서 특별히 맥주와 와인을 내놓기 시작하고부터 NHK홀, 문화회관에서도 내놓게 된 것은 늦은 감은 있어도 뜻을 이루었다고나 할까.
그렇긴 해도, 그런것을 마시지는 못할망정 교회에서 듣는 음악은 각별하다. 센다이에서는 토호쿠(東北)학원 예배당에서 난생 처음 파이프오르갠을 들었다. 바하의 저음이 차가운 나무의자로부터 곧바로 몸에 전달되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도쿄에서는 메지로 이외에 텐엔쵸후(田園調布) 혹은 오모리(大森) 교회등이 아와노유미코(淡野弓子)의 지휘와 함께 잊을 수 없다. 멀리는 하이델베르크 성령교회에서 청취한 파이프오르갠, 로텐브르그의 성야곱교회에서의 ‘바하의 저녁무렵’이 좋았다.
이제 듣는 건 이정도로 해두고 연주에 대해서인데, 얘기할만한 것은 못되지만 구제2고 무렵부터 피아노를 시작했다. 바하의 한곡이 목표였지만 지금은 보다 편한 엘렉톤으로 바꾸고 말았다. 현재 감개무량한 일은 30년 전에 곧잘 연주하던 엘릭 사티의 곡이 오늘날 대유행하여 이곳저곳 BGM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1989년 3월)

슈트라우스의 즐거움
슈트라우스라고 하면 ‘장미의 기사’의 리히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잊을 수 없으나 즐거움으로 말하자면 역시 비엔나의 슈트라우스일가, 특히 왈츠의 왕 요한 2세를 꼽는데 그다지 이론은 없을 것으로 안다.
오페레타의 걸작 ‘박쥐’를 비롯하여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봄의 소리’ 등등 주옥같은 수많은 왈츠등 어느 곡이 울려나와도 사람들은 즉각 그 멜로디의 포로가 되고 흘러간 청춘을 되새길 것이다.
나에게 마침 맥주친구 가운데 슈트라우스협회 회원이 있어 그의 권유로 입회하였는데, 회비에 비해 많은 즐거움을 배당받고 있기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 요한스트라우스협회’를 알리기 위해 붓을 들게 되었다.
이 협회는 요한슈트라우스 2세의 탄생 150주년에 해당하는 1975년에 설립, 명예회장으로 비엔나국립가극장 총감독이었던 로린 마젤씨를 영입하고, 파이오니어의 마츠모토(松本誠也)씨를 회장으로 하여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다.
회원은 전원 작품번호를 갖고 있어, 회합에서의 발언이나 발표에서는 지명받기 전에 작품번호를 말하거나 쓰는 것이 관례이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활동은 다방면에 이르고 있는데, 일본 요한슈트라우스협회 관현악단에 의한 콤서트, 메모리얼 콘서트, 신년 및 납량무도회(최근 새해에는 하마리큐 아사히홀을 많이 쓴다), 국제교류파티, 국제대회에 참가(작년에는 독일 콩부르그에서 실시되었다), 회보와 회지 ‘슈트라우시아데’ 발행, 그 밖에 댄스부 자료부등이 있고 각각 활동은 활발하다.
수년전 일인데 스웨덴회원 열댓명이 방일했을 때 당협회에 경의를 표명하기 위해 방문하여 환영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 그 석상에서 산부인과의사이기도 한 한 회원이 모체로의 소닉체어에 의한 각종 음악의 태아심박이 미치는 영향을 강연하여 산과의로서 매우 흥미깊게 들었는데, 질문 기회도 있어 매우 의의가 있었다.
국제교류파티라는 것은 연주를 위해 방일한 포크스오버나 비엔나필의 멤버와의 간친회로서, 지휘자 비블, 에슈베씨라던가 테너의 빈첸트씨 등과 즐겁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은 추억이 되었다. 회가 끝날 무렵에는 협회원과 이야기를 나눈 게스트가 함께 모든사람 앞에 서서, 회원이 이야기 나눈 내용을 모두에게 전하고, 게스트도 알고 있는 일본어로 맞장구를 쳐 모두를 웃기는, 그러한 취향의 즐거운 교류회였다.
잊지못할 에피소드는 나와 이야기를 나눈 콘서트 마스터 R씨의 아름다운 부인이 실은 프리마발레리너이고 더욱이 현재 임신중이라는 것. 그렇다면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때 나의 클리닉에 전화 걸어 불러주십시오, 라고 웃으면서 말하고 헤어졌다. 그 여인이 다음날 가 본 오페레타 ‘박쥐’ 중에서 발레 듀엣을 흐르듯이 우아하게 춤춰보였을 때는 감격하여 마음속으로부터의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그 밖에 막간에 오케스트라박스를 방문하여 낯익은 연주가들과 눈을 맞춰 윙크를 교환하는 일도 즐거움이었다. ‘어 또 왔어?’ ‘응! 또 왔어’ 슈트라우스 음악은 어디서 들어도 즐거우나 비엔나에서 동행한 G선생들과 청취한 슈트라우스는 각별했다. 해가 지고 황혼에 물든 시립공원 슈투라우스동상 앞에서의 춤과 와인을 즐기면서 듣던 슈트라우스. 그린트윙 선술집에서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으로 듣던 슈트라우스.
하지만 그날 밤 숙소인 임페리얼호텔 바에서 G선생과 듣던 슈트라우스도 잊을 수 없다. 피아니스트는 언뜻 슈베르트와 닮은 느낌의 멋진 청년으로 처음에는 쇼팽등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틈을 봐서 슈트라우스를 아무거든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비엔나 정통의 갖가지 슈트라우스를 연주해줘 감격했다. 다음날 또 갔더니 이제 얼굴이 익은 사이. 곧 눈에 띄지 않게 슈트라우스의 곡으로 바꿔 연주해주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그때의 잊을 수 없었던 에피소드는, 매일 밤 바가 끝날 무렵이 되면 피아니스트보다 약간 연상일 듯싶은 여성이 같은 장소에 나타나 연주가 끝나면 조용히 그를 데리고 사라지는 것이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다를것 없는 사랑의 세계를 엿본듯, 명화의 한 장면과 같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 한번은 통일 전의 베를린에서의 일로, 1985년 국제산부인과학회가 서베를린에서 개최되었을 때였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아내와 둘이서 조그만 택시로 찰리포인트를 넘어 동쪽 호텔에 들어갔다. 길고도 냉랭한 체크였기에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해 준 슈트라우스의 곡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속속들이 녹여주었다.
슈트라우스를 쓰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것 중 하나로 비엔나필의 뉴이어콘서트가 있다. 이제는 위성방송 덕에 오토소(屠蘇)건 와인이건 간에 즐겨 마시는 술을 한손에 들고 텔레비존을 통해 동시에 즐길 수가 있다. 그 곡목의 대부분이 슈트라우스이기에 슈트라우스팬에게는 더할나위없다. 게다가 지휘자로 차례차례 카라얀 마젤 아바드 메타 클라이버등 호화찬란하니 두말할 것도 없다.
내년의 뉴이어즈콘서트는 꼭 알본슈트라우스협회 회원이 되어 즐기시기를! (199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