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아 울어주렴 - 무라카미 하루키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버들아 울어주렴
무라카미 하루키
버드나무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제대로 형태를 갖춘 버드나무를 발견하여 정원에 심었다. 마음이 내킬 때 그 아래에 의자를 내다놓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겨울은 역시 추워도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서는 가느다랗고 파란 잎새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려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버들은 튼튼한 나무라 그냥 놔두면 금세 잎이 무성해지기 때문에 가끔씩 정원사를 불러 머리 손질을 한다.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다듬으면 상큼해지고 가지도 가벼워져서, 고것들이 새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은 마치 소녀들이 질리지도 않고 온종일 춤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뛰어오르고 흐르는 듯 하다가는 회전도 하고, 버들이라는 나무는 가녀리고 우아하지만 [눈에 꺾이는 버들 없다]는 옛말이 있다. 쓸데없이 우람한 나무보다 낭창낭창하고 부드러운 버들이 의외로 버틴다는 뜻이다.
미국의 옛 노래에 [버들아 울어주렴(Willow Weep for Me)] 이라는 게 있다. 빌리 홀리데이가 기막히게 불러준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괴로운 마음을 버드나무에 절절히 호소하는 내용의 노래인데, 어째서 버들이 그 누군가를 위해 울어줘야 하는가? 영어권에서는 [능수버들]을 weeping willow라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weep라는 단어에는 [흐느끼다]라는 본래 의미 이외에 나뭇가지 같은 것이 휘어 축 늘어진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영미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버들을 보면 ‘아아 버들이 흐느끼고 있구나’ 와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에 반해 일본의 경우 버들은 곧 ‘휴도로도로’ 하는 귀신이다. 문화에 따라 사물의 이미지가 굉장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영미인이 버드나무에서 으스스한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영국 작가 알자논 블랙우드의 소설에 ‘버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순수한 괴담인 것이다. 다뉴브강을 보트를 저어 건너는 두 사람의 청년이 버들이 무성한 모래섬에서 야영을 하다가 살아 움직이는 버들에게 공격당하는 이야기이다. 버들이 와삭와삭 한밤의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며 두 사람을 차례로 수중에 끌어넣는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로, 구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템포는 무척 느리지만 한줄한줄 착실하게 읽다 보면 차츰 실감이 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버들이라고 하는 나무는 어딘가 [의인화(擬人化)]해버리고 싶어지는 이상한 생명력을 갖춘 듯 하다.
옛날 중국 여성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슬며시 건네주었다고 한다. 유연한 가지는 좀처럼 부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지 속에 [휘이다=돌아오다] 와 같은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로맨틱해서 좋다.
나는 신칸센이 나고야(名古屋)역에 도착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버들아 울어주렴]을 흥얼거리고 마는데, 이는 그저 단순히 역에서 위로우(和菓子)를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무라카미 하루키
버드나무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제대로 형태를 갖춘 버드나무를 발견하여 정원에 심었다. 마음이 내킬 때 그 아래에 의자를 내다놓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겨울은 역시 추워도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서는 가느다랗고 파란 잎새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려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버들은 튼튼한 나무라 그냥 놔두면 금세 잎이 무성해지기 때문에 가끔씩 정원사를 불러 머리 손질을 한다.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다듬으면 상큼해지고 가지도 가벼워져서, 고것들이 새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은 마치 소녀들이 질리지도 않고 온종일 춤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뛰어오르고 흐르는 듯 하다가는 회전도 하고, 버들이라는 나무는 가녀리고 우아하지만 [눈에 꺾이는 버들 없다]는 옛말이 있다. 쓸데없이 우람한 나무보다 낭창낭창하고 부드러운 버들이 의외로 버틴다는 뜻이다.
미국의 옛 노래에 [버들아 울어주렴(Willow Weep for Me)] 이라는 게 있다. 빌리 홀리데이가 기막히게 불러준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괴로운 마음을 버드나무에 절절히 호소하는 내용의 노래인데, 어째서 버들이 그 누군가를 위해 울어줘야 하는가? 영어권에서는 [능수버들]을 weeping willow라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weep라는 단어에는 [흐느끼다]라는 본래 의미 이외에 나뭇가지 같은 것이 휘어 축 늘어진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영미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버들을 보면 ‘아아 버들이 흐느끼고 있구나’ 와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에 반해 일본의 경우 버들은 곧 ‘휴도로도로’ 하는 귀신이다. 문화에 따라 사물의 이미지가 굉장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영미인이 버드나무에서 으스스한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영국 작가 알자논 블랙우드의 소설에 ‘버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순수한 괴담인 것이다. 다뉴브강을 보트를 저어 건너는 두 사람의 청년이 버들이 무성한 모래섬에서 야영을 하다가 살아 움직이는 버들에게 공격당하는 이야기이다. 버들이 와삭와삭 한밤의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며 두 사람을 차례로 수중에 끌어넣는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로, 구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템포는 무척 느리지만 한줄한줄 착실하게 읽다 보면 차츰 실감이 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진다. 버들이라고 하는 나무는 어딘가 [의인화(擬人化)]해버리고 싶어지는 이상한 생명력을 갖춘 듯 하다.
옛날 중국 여성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슬며시 건네주었다고 한다. 유연한 가지는 좀처럼 부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지 속에 [휘이다=돌아오다] 와 같은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로맨틱해서 좋다.
나는 신칸센이 나고야(名古屋)역에 도착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버들아 울어주렴]을 흥얼거리고 마는데, 이는 그저 단순히 역에서 위로우(和菓子)를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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