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토막상식 -12- 메이지시대에는 왜 콧수염들을 길렀을까요?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메이지(明治)시대에는 왜 콧수염들을 길렀을까요?
요즘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이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유행으로, 취직이 결정되면
거의 깎아 버립니다.
메이지시대의 수염은 지위의 상징으로서 초창기에는 관리들만 길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선생,
학자, 군인등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명치유신은 30대부터 40대에 걸친 젊은이가 주축을 이룬 정변이었습니다. 이들이 신정부의
요좌를 차지하였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관록이 부족해 보여,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답니다.
메이지 초기의 수염은 [八자수염]이라 불리는 두툼한 八자 형태로서, 가능한 한 굵게 만들기 위해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무척 고심을 했다고 합니다.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카이젤형 수염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코밑의 수염 끝을 가늘게 위로 뻗치게 하는 이 [카이젤 수염]은
손질하기가 매우 어려워 전용 남성 화장품까지 생산될 정도였습니다.
독일 황제 [카이젤]이 이끄는 당시의 독일은 세계 열강 중 가장 착실하게 군비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고, 여러면에서 독일방식을 채용하고 있던 일본군에 있어 카이젤은 동경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이젤형 수염은 군인을 중심으로 전일본에 퍼져나갔고,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벌이 노동자에게까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 에도시대에는 왜 지폐가 없었을까요?
에도시대의 통화는 금화, 은화, 전화(錢貨)의 세 가지였습니다. 금화는 오한(大判)과 코한(小判)으로
되어있고, 코한 한 개가 1량이었습니다. 그 밖에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아무튼 금화, 은화, 전화가
토쿠가와(德川) 막부의 정화이고, 각 번(藩)은 자신들의 영내에서만 통용하는 번찰을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막부가 주조하는 정화만으로는 번의 경영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이처럼 토쿠가와시대에는 자령(自領) 내에서만 통용하는 지폐는 있었으되 막부 발행의
전국 통용 지폐는 없었습니다. 이는 막부가 수시로 시행한 통화의 개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막부는 재정이 어려워지면 통화를 개주하여 금 은 동의 함유량을 내림으로서 재정위기를
넘기려했습니다(개주=물타기 작전).
다시말해 막부는 통화의 주조권을 독점하여 유통경제를 컨트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메이지(明治)에 이르러 평민에게도 성(姓)을 붙이게 한 이유는..?
일본에서는 에도시대까지 무사계급 이외에 부농과 호상(豪商)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민들은 그저 [xx가게의 누구] [xx마을의 아무개]와 같은 식으로 직업이나 주거지를
이름 위에 붙여 성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8년(1875년), 평민도 모두 성을 갖도록 하는 법률이 생긴 것입니다.
이 법률은 신분제도의 철폐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법률 시행에 열을 올린 곳은
다름 아닌 육군성이었습니다. 국민개병(國民皆兵)이라는 이름 아래 징병령이 내려진 것이
메이지 6년인데, 막상 징병령을 내고 보니 호적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긴 [xx마을의 곰베이.하루코의 아들 곤스케]라고 쓰여진 호적으로는
일처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겠죠.
한사람도 빠짐없이 성을 붙여야 한다는 이 법률에 대해, 국민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징병이 마음에 걸렸던 거죠. 할 수 없이 정부는 성을 붙이지 않고 질질 끄는 집에 대해
절의 주지스님에게 작명을 해 주도록 명했고, 머리가 아파진 스님은, 산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야마나카(山中), 나무가 많은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는 키무라(木村)와 같이 되는대로
지어주게 되었답니다.
그러고 보면 타나카(田中), 키시(岸), 이시하라(石原), 카와바타(川端)등등 유명인사들의 조상도
별로 잘난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요즘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이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유행으로, 취직이 결정되면
거의 깎아 버립니다.
메이지시대의 수염은 지위의 상징으로서 초창기에는 관리들만 길렀습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선생,
학자, 군인등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명치유신은 30대부터 40대에 걸친 젊은이가 주축을 이룬 정변이었습니다. 이들이 신정부의
요좌를 차지하였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관록이 부족해 보여,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답니다.
메이지 초기의 수염은 [八자수염]이라 불리는 두툼한 八자 형태로서, 가능한 한 굵게 만들기 위해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무척 고심을 했다고 합니다.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카이젤형 수염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코밑의 수염 끝을 가늘게 위로 뻗치게 하는 이 [카이젤 수염]은
손질하기가 매우 어려워 전용 남성 화장품까지 생산될 정도였습니다.
독일 황제 [카이젤]이 이끄는 당시의 독일은 세계 열강 중 가장 착실하게 군비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고, 여러면에서 독일방식을 채용하고 있던 일본군에 있어 카이젤은 동경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이젤형 수염은 군인을 중심으로 전일본에 퍼져나갔고,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벌이 노동자에게까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 에도시대에는 왜 지폐가 없었을까요?
에도시대의 통화는 금화, 은화, 전화(錢貨)의 세 가지였습니다. 금화는 오한(大判)과 코한(小判)으로
되어있고, 코한 한 개가 1량이었습니다. 그 밖에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아무튼 금화, 은화, 전화가
토쿠가와(德川) 막부의 정화이고, 각 번(藩)은 자신들의 영내에서만 통용하는 번찰을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막부가 주조하는 정화만으로는 번의 경영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이처럼 토쿠가와시대에는 자령(自領) 내에서만 통용하는 지폐는 있었으되 막부 발행의
전국 통용 지폐는 없었습니다. 이는 막부가 수시로 시행한 통화의 개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막부는 재정이 어려워지면 통화를 개주하여 금 은 동의 함유량을 내림으로서 재정위기를
넘기려했습니다(개주=물타기 작전).
다시말해 막부는 통화의 주조권을 독점하여 유통경제를 컨트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메이지(明治)에 이르러 평민에게도 성(姓)을 붙이게 한 이유는..?
일본에서는 에도시대까지 무사계급 이외에 부농과 호상(豪商)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민들은 그저 [xx가게의 누구] [xx마을의 아무개]와 같은 식으로 직업이나 주거지를
이름 위에 붙여 성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8년(1875년), 평민도 모두 성을 갖도록 하는 법률이 생긴 것입니다.
이 법률은 신분제도의 철폐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법률 시행에 열을 올린 곳은
다름 아닌 육군성이었습니다. 국민개병(國民皆兵)이라는 이름 아래 징병령이 내려진 것이
메이지 6년인데, 막상 징병령을 내고 보니 호적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긴 [xx마을의 곰베이.하루코의 아들 곤스케]라고 쓰여진 호적으로는
일처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겠죠.
한사람도 빠짐없이 성을 붙여야 한다는 이 법률에 대해, 국민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징병이 마음에 걸렸던 거죠. 할 수 없이 정부는 성을 붙이지 않고 질질 끄는 집에 대해
절의 주지스님에게 작명을 해 주도록 명했고, 머리가 아파진 스님은, 산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야마나카(山中), 나무가 많은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는 키무라(木村)와 같이 되는대로
지어주게 되었답니다.
그러고 보면 타나카(田中), 키시(岸), 이시하라(石原), 카와바타(川端)등등 유명인사들의 조상도
별로 잘난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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