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토막상식 -11- 설날엔 왜 오세치(おせち)요리를 먹는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설날엔 왜 오세치(おせち)요리를 먹는가?
오래된 습관은 거의 모두 사라저가는 속에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것이 설날의 
[오세치 요리]이다. 식품천국인 요즈음도, 마른 멸치나 킨톤(金團-강낭콩이나 고구마 
등을 삶아 으깬 뒤 밤을 섞어 만든 음식)같은 별로 맛도 없는 요리까지 정초에 
습관적으로 식탁에 오른다.

[오세치]란 [오세치쿠(御節供)]를 줄인 말로서, 원래는 명절 때 궁중에서 잔칫상에 
내놓았던 요리를 이르는 말이었다. 헤이안(平安)시대, 궁중에서는 1월 1일과 7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과 같은 명절이 되면 신에게 음식을 받치고 축하 
요리를 만들어 잔치를 벌였는데, 이런 잔치요리가 차츰 생략되면서 설날에 베푸는 
요리만을 [오세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세치]를 설 음식이란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 듯, 고서에도 
오다노부나가 (織田信長)가 정월 초닷새에 다이묘(大名)들을 초대하여 신년의 오세치
잔치를 베풀었다고 쓰여 있다.  오세치요리를 설날에 먹는 습관은 오랜 역사 속에서 
궁중의 법도가 민간으로 흘러들어 전승된 것이리라.

그러면서 차츰 [오세치]에 여러가지 의미가 부여되었고, 정월 초하루부터 사흘 동안 
주부를 부엌일에서 벗어나 쉬게 하도록, 섣달 그믐날 음식을 넉넉히 만들어 찬합에 
차곡차곡 담아 놓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 설날(お正月)에는 왜 [카도마츠(門松)]를 세울까?
옛부터 설날이 되면 집집마다 대문에 [카도마츠]를 장식했다. 요즘은 은행이나 큰 회사 
건물 상점 등에서나 이런 카도마츠를 세울 뿐, 일반 가정에서는 소나무가지를 문기둥에 
걸어놓는 정도로 간략화되었다.
옛날 사람들이 카도마츠를 장식하고 설을 맞는 습관은 원시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의 카미다나(神棚)라는 것을 봐도 알수 있듯이 옛날사람들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天照大神), 조상신, 수호신 등 갖가지 신을 모셔 놓고 받들었다.

많은 신들 가운데 오곡을 지키는 [토시가미(年神)]라는 신은 봄이 시작되는 첫째날 즉
정월 초하루에 찾아온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신을 맞이하기 위해 카도마츠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카도마츠는 도시가미가 머무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카도마츠는 소나무 이외에도 밤나무나 졸참나무 비쭈기나무 등으로 제작하였는데, 
카마쿠라시대 이후부터 요즘처럼 주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섞어 만들게 되었다. 
이 장식은 12월 28일까지 완성해야 하며, 거두는 날은 지방마다 다르되 보통 1월 
7일부터 15일 사이라고 한다. 

정월 7일이 지나면 [松の內も過ぎて..]라는 말을 곧잘 사용하는데, 이렇게 소나무를 
장식해 두는 동안을 [松の內]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 懷石料理와 會席料理는 어떻게 다른가?
카이세키료리(懷石料理)의 회석이란 주머니 안에 돌을 넣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선종(禪宗)의 스님이 공복을 일시적으로 잊기 위해 데운 돌을 주머니 안에 넣어 위를 
따뜻하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실제로 흉내내어보면 공복감이 덜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즉 회석요리는 원래는 배를 뎁힐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식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식도락의 극치로서, 여간해서 구할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면서 겉모양만 간소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이른바 호화요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얼마나 호화로운가 하면, 시만토가와
(四万十川-四國) 원류의 물을 날라다 차를 끓인다거나, 연말에, 이른 봄에 나는 머위 새순을 
사용하여 봄을 연출하가도 하고, 쿠마모토의 잉어를 산채로 가져다 쓰는 등등이다. 
손님의 주머니를 긁어 음식점의 주머니를 따뜻하게 만드는 지혜라고나 할까.

최근에는 會席料理라고도 하는데, 이는 懷石料理와 동일한 의미이다. 굳이 구별하자면,
다도에서는 會席料理, 선어(禪語)로는 懷石料理라고 부른다는 정도 아무튼 본래의 의미인
懷石料理라고 해야 더욱 호하로운 느낌을 받는다.

* 칸사이(關西)와 칸토(關東)의 간이 다른 이유는?
칸사이사람이 토쿄에 가서 깜짝 놀라는 일은 소바나 우동 국물이 굉장히 탁하고 검다는 
것이다. 즉 간이 모두 진하다. 반대로 토쿄사람이 칸사이에서 우동을 시켰을 때 그 국물의 
담백함에 놀란다. 그럼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은 토쿄가 일본을 대표하는 대도시이나, 토쿠가와(德川)막부가 자리잡기 이전에는
쿄토(京都)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시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민이어서 매일 심한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칸토부시(關東武士)라고 불리는 사람들 역시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염분이 많은 식사를 즐기게 되고, 이 전통이 정착하여 
칸토에서는 자연스럽게 진한 간장맛이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칸사이는 일찍부터 이른바 
소비센터였기 때문에 지적 계급이 문화를 리드하여 엷은 맛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쿄(京)를 방문한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요리의 맛이 싱겁다고 격노하는 것을 보고,
쿄의 요리인들이 [촌놈]이라고 뒤에서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것을 미루어 
봐도 그때부터 간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