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음악 편력 - <스기모토 타케시 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1. 그것은 오르골에서 비롯되었다.
신주쿠(新宿) 케이오(京王)프라자호텔 로비 한 귀퉁이에, 아주 오래 된 작은 오르골점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발걸음이 멈춰지면서 여러 가지 오르골에 눈길이 빨려든다. 그리고 세피아색 먼 유년시절로 되돌아간다.
내가 처음 들었던 음악이 바로 오르골 소리였다. 폭이 1미터를 넘는 커다란 영국제로, 의사이셨던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소리를 내는 일품(逸品)이었다. 손으로 태엽을 꼭꼭 감으면 로시니의 가극 [세빌리아의 이발사] 전주곡을 시작으로 갖가지 명곡이 흘러나왔는데, 돌 지난지 얼마 안되던 내 귀에 어떻게 들렸을까.
불규칙적으로 바늘이 꽂혀진 굵은 구리색 납관(蠟管)이 조용히 돌기 시작하면 들려오는 오묘한 음은 이해를 뛰어넘어 곧장 몽환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2. 포터블 축음기 시절
오르골로 장난꾸러기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된 나는, 음악 애호가인 숙부댁에서 살게 되는 행운을 얻어, 본격적인 음악 세례를 받게 되었다.
SP판 축음기의 강철 바늘을 바꿔 끼고 태엽을 끊어지지 않도록 감는 법을 배우자, 나는 탐욕스럽게 듣기 시작했다. 생생의 [백조]와 [파리제]로 음악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알게 되었고, 베토벤의 [제5번], [크로첼], 멘델스존의 [이태리교향곡] 등등 멈출 줄을 몰랐다.
드볼작의 [신세계] 등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쇼와(昭和)18년으로, 일본은 패전 앞에서 희망을 지니지 못한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강철 바늘도 차츰 바닥이 나 죽침을 소중하게 자르기도 하고, 음이 밖으로 세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 지금 돌이켜보면 상상도 못할 환경 속에서, 가녀리게나마 음악은 마음의 양식으로서 계속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3. 패전 후의 공백을 메꿔 준 음악
한동안 패전으로 인한 쇼크로 허탈상태가 되어, 음악 같은 건 생각조차 못했는데, 시간과 함께 차차 음악에서 마음의 양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숨어서 듣던 양악을 전후에는 내놓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거짓말 같았다.
한편 레코드가게에도 중고레코드가 나돌기 시작하여 집에서 용돈이 오면 난 레코드가게를 뒤지고 다녔다. 레코드가게는 칸다(神田)에 많았는데, 멜로디사, 명곡당 등 열 집은 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듣던 곡은 바하의 첼로나 바이올린 무반주곡, 특히 카잘스의 레코드는 닳도록 들었다. 부르흐의 [콜.니드라이],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퓨슈의 [겨울 나들이]등도 그 당시 곧잘 듣던 곡으로 아직도 잊지 못한다.
4. 레코드.콘서트 시대
구제 2고에 합격한 것을 기뻐했던 것도 잠시, 곧 건강을 해쳐 시골에서 1년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 사귄 미술학도 S씨(후에 화가가 됨)를 비롯하여 몇 명의 친구 덕택으로 나의 음악체험은 크게 팽창하게 되었다. 서로 가지고 있는 레코드를 돌려가며 듣거나, 레코드 콘서트 개최 등으로 청취한 곡은 셀 수 없이 많다. 베토벤, 브람스등의 교향곡, 협주곡, 그것도 지휘자를 바꾸고 연주자를 바꿔 귀를 기울였다.
콘서트 프로그램은 S씨가 손수 해설 안에 작곡가와 지휘자의 얼굴을 그려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끝이 나면 함께 스토브를 둘러싸고 앉아 싸구려 술을 마시면서, 토스카니니의 기침소리가 들렸다는 둥 멘겔베르그의 지휘가 어떻다는 둥 서로 논하던 일도 그립다.
친구를 사귀면 시야가 넓어지고 갖가지 곡의 좋은 점을 알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가 즐겨 모으고 있던 샹송을 S씨를 비롯한 모두가 좋아하여, 샹송만의 콘서트를 열어 호평을 받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이 샹송이 인연이 되어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고, 후일 일본을 방문한 다미아를 무대 뒤로 찾아가, 서투나마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런 콘서트를 열던 무렵 전축 붐이 일었는데, 음질과 음량에 감격하여 서로 경쟁적으로 장만해서는 자랑을 했다.
5. 구제 고교 때부터 대학 시절
이 때 쯤에는 레코드도 신보(新譜)가 나오게 되었는데, 음반 질이 나빠 탁탁 튀는 듯한 소리가 섞여 애를 먹었다. 이 점, 전쟁 전의 레코드는 음질이 좋아서, 중고 레코드방을 돌아다니며 진품을 찾아내는 게 즐거움이었다. 센다이(仙臺)에는 레코드방이 적어, 곧잘 칸다(神田)를 돌면서 원하던 걸 손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것이 카페, 부슈, 레너 등의 베토벤 또는 드뷔시의 사중주로, 특히 작품 127, 130, 131, 132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엘레나 게르하르트나 롯데 레만의 가곡도 자주 들었지만, 바랑, 바트리, 크로아자라의 명창에 의한 폴레, 드비시도 마음 깊이 남아있다.
왜 프랑스 근대가곡에 끌렸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패전의 쇼크가 오래 꼬리를 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샹송이라던가, 스탕달, 모파상, 보를레르등, 당시 탐독했던 소설이나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르트르, 까뮤 등을 즐겨 읽던 시절이었다.
신주쿠(新宿) 케이오(京王)프라자호텔 로비 한 귀퉁이에, 아주 오래 된 작은 오르골점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발걸음이 멈춰지면서 여러 가지 오르골에 눈길이 빨려든다. 그리고 세피아색 먼 유년시절로 되돌아간다.
내가 처음 들었던 음악이 바로 오르골 소리였다. 폭이 1미터를 넘는 커다란 영국제로, 의사이셨던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소리를 내는 일품(逸品)이었다. 손으로 태엽을 꼭꼭 감으면 로시니의 가극 [세빌리아의 이발사] 전주곡을 시작으로 갖가지 명곡이 흘러나왔는데, 돌 지난지 얼마 안되던 내 귀에 어떻게 들렸을까.
불규칙적으로 바늘이 꽂혀진 굵은 구리색 납관(蠟管)이 조용히 돌기 시작하면 들려오는 오묘한 음은 이해를 뛰어넘어 곧장 몽환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2. 포터블 축음기 시절
오르골로 장난꾸러기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된 나는, 음악 애호가인 숙부댁에서 살게 되는 행운을 얻어, 본격적인 음악 세례를 받게 되었다.
SP판 축음기의 강철 바늘을 바꿔 끼고 태엽을 끊어지지 않도록 감는 법을 배우자, 나는 탐욕스럽게 듣기 시작했다. 생생의 [백조]와 [파리제]로 음악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알게 되었고, 베토벤의 [제5번], [크로첼], 멘델스존의 [이태리교향곡] 등등 멈출 줄을 몰랐다.
드볼작의 [신세계] 등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쇼와(昭和)18년으로, 일본은 패전 앞에서 희망을 지니지 못한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강철 바늘도 차츰 바닥이 나 죽침을 소중하게 자르기도 하고, 음이 밖으로 세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 지금 돌이켜보면 상상도 못할 환경 속에서, 가녀리게나마 음악은 마음의 양식으로서 계속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3. 패전 후의 공백을 메꿔 준 음악
한동안 패전으로 인한 쇼크로 허탈상태가 되어, 음악 같은 건 생각조차 못했는데, 시간과 함께 차차 음악에서 마음의 양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숨어서 듣던 양악을 전후에는 내놓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거짓말 같았다.
한편 레코드가게에도 중고레코드가 나돌기 시작하여 집에서 용돈이 오면 난 레코드가게를 뒤지고 다녔다. 레코드가게는 칸다(神田)에 많았는데, 멜로디사, 명곡당 등 열 집은 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듣던 곡은 바하의 첼로나 바이올린 무반주곡, 특히 카잘스의 레코드는 닳도록 들었다. 부르흐의 [콜.니드라이],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퓨슈의 [겨울 나들이]등도 그 당시 곧잘 듣던 곡으로 아직도 잊지 못한다.
4. 레코드.콘서트 시대
구제 2고에 합격한 것을 기뻐했던 것도 잠시, 곧 건강을 해쳐 시골에서 1년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 사귄 미술학도 S씨(후에 화가가 됨)를 비롯하여 몇 명의 친구 덕택으로 나의 음악체험은 크게 팽창하게 되었다. 서로 가지고 있는 레코드를 돌려가며 듣거나, 레코드 콘서트 개최 등으로 청취한 곡은 셀 수 없이 많다. 베토벤, 브람스등의 교향곡, 협주곡, 그것도 지휘자를 바꾸고 연주자를 바꿔 귀를 기울였다.
콘서트 프로그램은 S씨가 손수 해설 안에 작곡가와 지휘자의 얼굴을 그려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끝이 나면 함께 스토브를 둘러싸고 앉아 싸구려 술을 마시면서, 토스카니니의 기침소리가 들렸다는 둥 멘겔베르그의 지휘가 어떻다는 둥 서로 논하던 일도 그립다.
친구를 사귀면 시야가 넓어지고 갖가지 곡의 좋은 점을 알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가 즐겨 모으고 있던 샹송을 S씨를 비롯한 모두가 좋아하여, 샹송만의 콘서트를 열어 호평을 받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이 샹송이 인연이 되어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고, 후일 일본을 방문한 다미아를 무대 뒤로 찾아가, 서투나마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런 콘서트를 열던 무렵 전축 붐이 일었는데, 음질과 음량에 감격하여 서로 경쟁적으로 장만해서는 자랑을 했다.
5. 구제 고교 때부터 대학 시절
이 때 쯤에는 레코드도 신보(新譜)가 나오게 되었는데, 음반 질이 나빠 탁탁 튀는 듯한 소리가 섞여 애를 먹었다. 이 점, 전쟁 전의 레코드는 음질이 좋아서, 중고 레코드방을 돌아다니며 진품을 찾아내는 게 즐거움이었다. 센다이(仙臺)에는 레코드방이 적어, 곧잘 칸다(神田)를 돌면서 원하던 걸 손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것이 카페, 부슈, 레너 등의 베토벤 또는 드뷔시의 사중주로, 특히 작품 127, 130, 131, 132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엘레나 게르하르트나 롯데 레만의 가곡도 자주 들었지만, 바랑, 바트리, 크로아자라의 명창에 의한 폴레, 드비시도 마음 깊이 남아있다.
왜 프랑스 근대가곡에 끌렸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패전의 쇼크가 오래 꼬리를 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샹송이라던가, 스탕달, 모파상, 보를레르등, 당시 탐독했던 소설이나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르트르, 까뮤 등을 즐겨 읽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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