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음악 수행 - 스기모토타케시 저 -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1. [지금부터 피아니스트]
금년 6월, NHK에서 방영한 [지금부터 피아니스트]라는 프로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나이 들고 나서 피아노를 시작한 사람들이 연주회에서 연주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은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재방송까지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컴퓨터 동호회의 포럼.F멜로 휴게실에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코멘트를 달아주어, 내 느낌이 나 한사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프로를 계기로, 나도 많은 동지들 앞에서 익숙지는 못하나마 피아노를 치게 된 것이다. 이는 내게 있어 근년에 발생한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다.
2. 음악 수행 시작
내가 피아노에 접한 건 구제 고교2학년 때였다. 당시 신세를 지고 있던 의학부 E교수 댁에서였는데, 늘 SP레코드로 듣던 음에 비해 얼마나 아름다운 음색인가를 알게 되었고, 마침,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W군이 있어 그 친구와 함께 개인교수를 받기로 했다. 그는 마치 바하와 같은 체격의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순서대로 바이엘을 시작했다. 그 후 내가 좋아하는 악보를 구해 그것을 쳐보곤 했는데, 선생님은 너그러이 눈감아주셨다. 그 악보의 하나가 엘릭.사티의 [짐노페디]이고, 또하나는 바하의 평균율이었다. 당시 하숙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키모노 주머니에 악보를 넣고, 공동탕에서 목욕을 한 다음, 앞서 말한 E교수 댁으로 피아노를 치러 갔다. 그 시절에 즐겨 듣던 곡은 바하나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이었다.
그러나 이 연습도 대학입시 공부를 위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피아노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3. 음악 수행 중단
대학에 들어가자 갑자기 공부 때문에 바빠졌다. 이 점은 의과가 심한 듯, 피아노에는 자연히 소홀해지고, 고작 레코드(SP-LP)를 듣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한편, 나는 그 때 영문 타이프를 배웠는데, 지금은 쓸모 없게 되었으나, 그것이 피아노, 나아가서 컴퓨터의 밑거름이 될 줄 그 때는 상상도 못했다.
대학 병원으로 들어가자 더욱 바빠져서 피아노나 음악회 같은 건 엄두도 못냈다. 그래도 피아노가 있는 방을 찾아, 손이 녹슬지 않도록 쳐보기는 했다.
奧澤에서 지낸 집의 여주인이 우연하게도 어머니의 여고 후배라고 하여 놀랐다. 그곳에는 후에 K대학 불문과 교수가 된 사람이 하숙하고 있어, 우리는 곧잘 한잔하면서 문학론을 펼치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임상실험, 박사논문준비의 틈새를 이용하여 신극을 보거나 영어회화를 배우고, 오페라 구경이라던가, 특히 친숙해진 미야자와아키코씨의 리사이틀에도 가고, 메사이어, 마타이 등을 들으면서 쏘다녔다.
헌데, 앞에 나온 피아노 친구 W군은 순환기 전문의가 되었으면서도 술과 담배로 심근경색에 걸려 50세도 안되어 타계했고, 불문과 교수도 얼마 전에 사망하였다. 슬픈 일이다.
4. 엘렉톤 구입
이전에 자식들을 위해 피아노를 구입했으나, 그 땐 피아노에 대한 정열이 어느정도 식어있었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손가락 힘이 쇠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자각하게 되었다.
당시 야마하 등이 엘렉톤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내가 그 그물에 걸려들었다. 피아노처럼 힘이 필요 없고, 반주가 저절로 들어가는 것도 매력이었다. 동네 교실에 다니면서 점점 매료되었다.
내게 다행이었던 것은 오르간의 음을 쉽게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엘렉톤을 사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건강 때문이고, 골프를 좀 줄여야 한다는 조건도 반대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전부터 연주하고 싶었던 바하의 [주여, 사람의 소망이여 기쁨이여]를 시작했다.
5. 음악회의 홍수
바하의 [주여, 사람의 소망이여 기쁨이여]는, 엘렉톤의 싱글핑거 기능을 사용하면 의외로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되어 엘렉톤에 빠져들어갔다.
그 당시 나와 친한 피아니스트가 독일 유학에서 귀국했는데, 그의 리사이틀 준비와, 그의 스승인 뮨헨의 피르너씨 연주회 돕기에 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느날인가 그 스승이 우리집을 방문, 베토벤의 110번 소나타를 쾅쾅 연주한 일은 감격적이었다. 아마도 우리집 피아노가 최고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한 자극도 있어 나의 음악 열은 식지 않고 계속되었다. 피아노연주만 해도 1972년의 켐프, 헤블러, 1979년의 칼 리히터, S. 리히텔, 1981년의 아르헤리치, 1986년의 호로비츠, 그 밖에도 데임즈, 우치다미츠코, 미야자와아키코 등등, 지금은 없어진 분쿄(文京)공회당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이러한 기회가 얼마만큼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는지 모른다.
6. 두 번째 선생님
엘렉톤을 구입하고 신이 나긴 했지만 배우러 다닐 시간은 없고, 선생 없이는 진도가 느리기 마련, 끙끙 앓고 있는데, 의사회 친구가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여대생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바람에 당장 일주일에 한번씩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 정체기미였던 내 실력이 놀랄만큼 잘 치게 되었다. [진주잡이 탱고]를 비롯하여, 하와이언, 엔카, 일본노래, 샹송 등 레퍼토리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건 재즈 풍으로 연주해보세요, 라던가, 발로 건반을 눌러보세요, 하고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다. 즐거운 시련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날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생의 "결혼하게 되었어요" 라는 한마디로 2년 남짓 배우던 일은 안녕을 고하고 말았다.
금년 6월, NHK에서 방영한 [지금부터 피아니스트]라는 프로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나이 들고 나서 피아노를 시작한 사람들이 연주회에서 연주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은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재방송까지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컴퓨터 동호회의 포럼.F멜로 휴게실에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코멘트를 달아주어, 내 느낌이 나 한사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프로를 계기로, 나도 많은 동지들 앞에서 익숙지는 못하나마 피아노를 치게 된 것이다. 이는 내게 있어 근년에 발생한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다.
2. 음악 수행 시작
내가 피아노에 접한 건 구제 고교2학년 때였다. 당시 신세를 지고 있던 의학부 E교수 댁에서였는데, 늘 SP레코드로 듣던 음에 비해 얼마나 아름다운 음색인가를 알게 되었고, 마침,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W군이 있어 그 친구와 함께 개인교수를 받기로 했다. 그는 마치 바하와 같은 체격의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순서대로 바이엘을 시작했다. 그 후 내가 좋아하는 악보를 구해 그것을 쳐보곤 했는데, 선생님은 너그러이 눈감아주셨다. 그 악보의 하나가 엘릭.사티의 [짐노페디]이고, 또하나는 바하의 평균율이었다. 당시 하숙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키모노 주머니에 악보를 넣고, 공동탕에서 목욕을 한 다음, 앞서 말한 E교수 댁으로 피아노를 치러 갔다. 그 시절에 즐겨 듣던 곡은 바하나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이었다.
그러나 이 연습도 대학입시 공부를 위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피아노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3. 음악 수행 중단
대학에 들어가자 갑자기 공부 때문에 바빠졌다. 이 점은 의과가 심한 듯, 피아노에는 자연히 소홀해지고, 고작 레코드(SP-LP)를 듣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한편, 나는 그 때 영문 타이프를 배웠는데, 지금은 쓸모 없게 되었으나, 그것이 피아노, 나아가서 컴퓨터의 밑거름이 될 줄 그 때는 상상도 못했다.
대학 병원으로 들어가자 더욱 바빠져서 피아노나 음악회 같은 건 엄두도 못냈다. 그래도 피아노가 있는 방을 찾아, 손이 녹슬지 않도록 쳐보기는 했다.
奧澤에서 지낸 집의 여주인이 우연하게도 어머니의 여고 후배라고 하여 놀랐다. 그곳에는 후에 K대학 불문과 교수가 된 사람이 하숙하고 있어, 우리는 곧잘 한잔하면서 문학론을 펼치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임상실험, 박사논문준비의 틈새를 이용하여 신극을 보거나 영어회화를 배우고, 오페라 구경이라던가, 특히 친숙해진 미야자와아키코씨의 리사이틀에도 가고, 메사이어, 마타이 등을 들으면서 쏘다녔다.
헌데, 앞에 나온 피아노 친구 W군은 순환기 전문의가 되었으면서도 술과 담배로 심근경색에 걸려 50세도 안되어 타계했고, 불문과 교수도 얼마 전에 사망하였다. 슬픈 일이다.
4. 엘렉톤 구입
이전에 자식들을 위해 피아노를 구입했으나, 그 땐 피아노에 대한 정열이 어느정도 식어있었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손가락 힘이 쇠약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자각하게 되었다.
당시 야마하 등이 엘렉톤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내가 그 그물에 걸려들었다. 피아노처럼 힘이 필요 없고, 반주가 저절로 들어가는 것도 매력이었다. 동네 교실에 다니면서 점점 매료되었다.
내게 다행이었던 것은 오르간의 음을 쉽게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엘렉톤을 사기로 결정했다. 첫째는 건강 때문이고, 골프를 좀 줄여야 한다는 조건도 반대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전부터 연주하고 싶었던 바하의 [주여, 사람의 소망이여 기쁨이여]를 시작했다.
5. 음악회의 홍수
바하의 [주여, 사람의 소망이여 기쁨이여]는, 엘렉톤의 싱글핑거 기능을 사용하면 의외로 쉽게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되어 엘렉톤에 빠져들어갔다.
그 당시 나와 친한 피아니스트가 독일 유학에서 귀국했는데, 그의 리사이틀 준비와, 그의 스승인 뮨헨의 피르너씨 연주회 돕기에 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느날인가 그 스승이 우리집을 방문, 베토벤의 110번 소나타를 쾅쾅 연주한 일은 감격적이었다. 아마도 우리집 피아노가 최고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한 자극도 있어 나의 음악 열은 식지 않고 계속되었다. 피아노연주만 해도 1972년의 켐프, 헤블러, 1979년의 칼 리히터, S. 리히텔, 1981년의 아르헤리치, 1986년의 호로비츠, 그 밖에도 데임즈, 우치다미츠코, 미야자와아키코 등등, 지금은 없어진 분쿄(文京)공회당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이러한 기회가 얼마만큼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는지 모른다.
6. 두 번째 선생님
엘렉톤을 구입하고 신이 나긴 했지만 배우러 다닐 시간은 없고, 선생 없이는 진도가 느리기 마련, 끙끙 앓고 있는데, 의사회 친구가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여대생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바람에 당장 일주일에 한번씩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 정체기미였던 내 실력이 놀랄만큼 잘 치게 되었다. [진주잡이 탱고]를 비롯하여, 하와이언, 엔카, 일본노래, 샹송 등 레퍼토리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건 재즈 풍으로 연주해보세요, 라던가, 발로 건반을 눌러보세요, 하고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다. 즐거운 시련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날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생의 "결혼하게 되었어요" 라는 한마디로 2년 남짓 배우던 일은 안녕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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