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I ・Y(Do It Yourself) : 무레요오코(群ようこ)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최근 수작(手作), D・I・Y가 주목되고 있는 모양이다. 한 때는, 아무튼 이것 사라 저것 사라 하면서 세상은 소비 일변도로, 어느 쪽인가 하면 수작(手作)은 촌스럽다고 생각되면서 기성제품을 사는 게 좋다고 여겼었다. 수작에 다시 눈을 돌리게 한 것은 기쁜 경향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과를 졸업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예를 좋아했다. 옛날 어머니는 모두 그랬다고 생각되는데, 집안의 이브자리를 꿰매 솜을 바꿔 넣고, 스웨터는 물론 겨울철 속옷까지 뜨개질하면서 자기들이 만들 수 있는 건 모두 만들었다. 오래 입은 옷은 이브자리 쪽으로 가고, 너덜너덜해진 헝겊은 총채가 되었다. 난 양재가 서툴러서 뜨개질 관계 일밖에는 판단할 수 없는데, 내가 뜨개질을 해 온 이유는 즐거움도 있지만, 같은 정도의 질로 된 걸 사고자 하면 끔찍한 가격이 되어 손수 만드는 편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전에는, 질 좋은 털실로 짠 스웨터를 유명 점포에서 10만엥으로 팔고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하면서,
‘스웨터는 스스로 짜는 수밖에 없다’ 고 생각했었다. 소비일변도의 시기에 손뜨개 스웨터가 유행했고, 손뜨개 스웨터는 값이 비싸기 때문에,
‘이러면 뜨개질 하는 사람이 많아질는지도’ 하면서 기뻐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모두 손뜨개 스웨터를 구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털실 질도 나쁘고, 별 수 없는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유명상점이 아닌 일반에게 팔리고 있는 스웨터를 보고 또 놀랐다. 질이 좋고 게다가 값도 적당하며 디자인도 귀엽다. 해외발주와 기술의 향상으로, 그 나름의 물건이 싸게 손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으음’
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 스웨터 가격은 거의 털실가격과 같을 정도니, 만드는 일이 몽땅 공짜가 되는 제도다.
‘같은 질의 물건을 사면 비싸니까’ 가 머릿속에 있었던 난 아연했다. 게다가 센스에 자신이 없으므로 같은 질의 실을 사서 손수 만든다고 해도 이처럼 만들어질는지 어떨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짜는데 시간도 걸린다.
‘맞아. 이건 모두 사겠지.’
역시 프로가 만든 것은 달랐다. 내게는 어떤 장르가 있었지만, 잘하는 아마추어라도 프로와는 동등하지 못했고, 역시 그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의 차이가 있다는 지론인데, 과연 그 스웨터가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스웨터 하나라도, 미묘한 밸런스에 따라 멋지게도 촌스럽게도 된다. 그 멋진 스웨터가 털실 값만으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애써 짜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없어질 것이다.
‘시간이 아깝다’ 라는 말을 들으면 그대로인 것 같고, 만드는 즐거움은 시간을 소비시키지만 거기서 만족감이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부정당하면, ‘아아 그렇군요.’ 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수작이 좋아요 라고 말해도, 현실을 생각하면 수작의 의미란 뭔가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잘 되도록 되어있어 최근은 슬로라이프의 영향으로 수작이 주목을 받아, ‘외식’은 ‘집에서 식사’가 되었고, 커다란 물건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수고로 만들 수 있음직한 소품 만들기도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수작이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품고 있다. 경우와 사정에 따라 주위에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몇 년인가 전에 어머니로부터,
‘모헤어 털실로 숄을 뜨고 싶어서 여러 장 짰지. 네게도 보낼게.’ 라고 전화가 왔다. 일단 어머니는 뜨개질 공부를 하고 있어서 남들 것을 짜기도 하기 때문에 기초도 있고 경험도 풍부했다. 별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그렇게 말하시기에 보내달라고 했다. 2,3일 지나 배달된 짐을 열어보고 난 눈이 점이 되었다.
‘뭐야, 이건’
그건 그저 털실의 투망(投網)이었다. 숭덩숭덩 그저 네트 모양으로 짜여있고, 초라한 술이 달려있었다. 도저히 집안에서도 몸에 붙이고 싶지 않았다.
‘뭐야, 그게. 너무하잖아요.’
화가 나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 역시. 간단하게 짠 건 안 되는구나.’ 라고 말한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역시 겨울이 가까워지면 뜨개질이 하고 싶어지신단다. 책을 보고 짜고 싶은 게 많이 있는데, 막상 짜기 시작하려고 하면 나이 때문에 눈이 피곤해져서 손이 많이 가는 무늬는 짤 수가 없다. 하지만 뭔가 짜고 싶어서 손쉽게 쓱쓱 짤 수 있는 걸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저건 지나쳐.’
아무리 모친이 손수 만든 거라고 해도, 투망 같은 숄은 사용할 수 없다. 젊은 사람이라면 편하게 어깨를 둘러싸서 그 나름의 패션이 되겠지만, 내가 그렇게 하면 마치 투망에 걸린 지장보살 같은 분위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때 생각난 것이, 여러 장 짰기 때문에 보낸다는 그녀의 말이었다.
‘설마, 다른 사람에게도 보내진 않았겠지.’
‘저어, oo씨하고, xx씨하고, 그리고, 기모노 리폼 교실에서 알게 된 @@씨하고....’
계속해서 이름이 나온다. 친척이라면 몰라도 이런 것을 남에게 당당하게 보내줬다니, 필시 상대방은 곤혹해하고 있을 것이다. 짜서 준 행위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줄는지 모르되, 현물이 털실 투망이라면 달갑잖은 친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떻든 상관없는 것을 몇 장씩이나 짜는 것 보다는, 단 한 장이라도 기합을 넣어 짜는 편이 훨씬 좋지 않은가.
‘창피하네. 이런 것을 주다니’
‘어머 그래. 꽤 평판이 좋은데’
‘모두 배려해서 그러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자각이 없는 건 무서운 일이다.
모친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어렸을 적 아버지의 부끄러운 일도 줄줄이 생각났다. 그도 수작을 좋아해서, D・I・Y 의 첫물로 책꽂이 등의 소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어린이 방을 만들어 줄게’ 라고 갑자기 초등학교 1년생인 내게 말했다. 만들어준다고 해도, 연립주택 마당의 넓이 같은 건 알만 해서,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만들려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물색 플라스틱의 물결무늬 커다란 널판이 몇 장인가 운반되어왔다. 그것을 아버지는 희희낙락 하시면서 톱으로 자르고 볼트로 고정하여 지붕을 붙이고, 같은 소재로 문까지 붙였다.
‘자- 됐다.’
그것은 한 평 정도의 플라스틱 오두막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땅바닥에 평상이 놓여있어 거기에 책상을 놓으라고 한다. 문을 열자 그 반동으로 오두막 전체가 흔들흔들 흔들렸다. 어린 마음에도 불안해져서, 책상 옮기는 일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연기하고 있었는데, 태풍이 왔다. 덧문을 닫고 집안에서 촛불을 켜고 있자니 바리바릿 하고 마당에서 무서운 소리가 나, 가족 일동 깜짝 놀았으나 모두 무언이었다. 다음날 아침, 덧문을 열어보니 예의 어린이 방은 멋지게 쓰러져 부서져 있었다. 지붕은 벗겨져서 옆집 담에 비스듬하게 걸려있었다. 아버지는 아연해하고 있었으나 나는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양친의 수작(手作)에는 문제가 있어, 수예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일말의 불안이 있지만, 그들은 다른 면의 교사이므로, 난 금년 겨울도 자신을 위한 뜨개질에 힘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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