浅田次郎의 [つばさよ、つばさよ] 중에서 <속 >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동북의 관우(關羽) -
차창 밖으로 끝간데 없는 동토의 대지가 지나간다.
심양(審陽)을 벗어나면 산도 강도 언덕도 골자기도 없이 하늘과 땅만이 망망한, 무색무채의 풍경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촌락이 있고, 구름 틈으로 칼같이 내리꽂는 햇살 아래 양떼가 노닌다.
구 만주라는 이름도 지금은 오랜 이야기다. 하지만 난 역사상의 경위야 어떻든 만주라는 호칭이 좋다. 적어도 중국 동북부라고 부르는 것 보다 만주라는 이름이 로맨틱하고 아름답다고 생각된다.
한 때, 역대의 중국왕조가 북쪽 오랑캐라고 겁을 먹던 여진 만주족의 오랜 땅이다. 용감하게, 떳떳하게, 문자조차 갖지 않았던 그들은, 태고로부터 수시로 한(漢)나라 땅을 위협했다. 방위상의 의미가 거의 없는 만리장성은, 한민족의 마음에 깃든, 그들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건조물이다.
만주족은 문수보살을 신앙했다고 한다. 문수는 산스크리트어인 만주슈리의 음역으로, 이것이 만주의 어원이 되었다.
문수는 보현과 함께 석가의 협시로 알려지고 있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왼쪽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라 일컫는다. 예로부터 무(武)를 남자의 덕목으로 삼았던 수렵민족인 그들이 지혜의 부처님을 신앙한 것은, 장성의 남쪽을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에서였을까?
이윽고 그들은 명(明)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李自成)을 쳐, 겨우 30만명의 만주족들 손으로 온 중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신해혁명(辛亥革命)까지 이어지는 청왕조(淸王朝)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오랜 풍습의 중국인 이미지로 알고 있는 변발이나 스탠딩칼라 옷, 옆이 트인 차이나드레스 등은, 실은 모두 기마민족인 만주족의 것이었다. 청국 황제의 성씨 아이싱교로(愛新覺羅)도 물론 한족 이름이 아니다. 문자를 갖지 못했던 그들은, 만주어인 [아이싱교로] 다시 말해 [금일족(金一族)]의 의미를 지닌 성을, 한어의 동음으로 끼워 넣어 그렇게 불렀다.
겨울에는 혹독한 동토가 되어버리나, 만주 토지는 비옥하다. 그건 오히려 서쪽에 사막이 육박해 있고, 황하의 범람에 골치를 앓는 하북성(河北省)보다 훨씬 풍요로운 나라라 할 수 있겠다. 한 때 이 대륙의 풍요로움에 착안하여, 장작림(張炸霖) 군벌의 지배로부터 빼앗으려고 했던 일본에게는, 원래 중국의 역사가 침략의 연쇄였다는 인식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확실히 중국의 역대 왕조 중 순수한 혈통의 한민족 정권이라고 한다면 한(漢)과 송(宋)과 명(明) 정도이고, 그 이외는 이른바 침략자가 한족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의 중국지배에 대의가 있을 리는 없다. 역사상의 기정사실이 정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우리들 일본인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닐는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미국으로부터 젖을 뗄 수 없고, 중국을 대하는 자세도 애매한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차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무미건조한 풍경이라고 할 정도인데 난 왠지 이 만추리아의 옛 고을이 너무 좋았다.
갑자기 누가 어깨를 쳤다. 군복을 입은 준엄한 얼굴의 병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빠른 북경어로 욕을 퍼부으면서 내 카메라를 빼앗아 가지고 사라져버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변에 촬영금지의 군 시설이라도 있었던가 생각해봐도 그럼직한 건물 같은 게 있을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카메라 몰수의 이유는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다.
중국 관헌 중에는 때때로 심보 고약한 놈이 있다. 예를 들어 북경 거리에서는 곧잘 볼 수 있는 광경인데, 교통위반자의 운전면허증을 경관이 빼앗고는 그냥 가버린다. 곧, 돌려받고 싶으면 뒷돈을 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한다? 일본인의 금전 감각으로 볼 때 그들이 납득할 정도의 인민원은 참으로 하찮은 액수이나, 왠지 나는 이전부터 묘하게 정의감이 강해, 이런 경우에는 금전의 과다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렇다고 해서 말다툼을 하면 어떤 큰 일로 번질는지 알 수 없다.
열차는 얼어붙은 땅 한가운데의 역에 정차했다. 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튼 중국인은 질서정연하게 열차나 버스를 타고 내리지 못한다. 빠른 사람이 임자라는 느낌으로 승강장은 대 혼잡을 이룬다.
그 때, 예의 병사가 내 카메라를 가슴에 건 채 나타나더니, 크게 소리치면서 승하차 정리를 시작했다. 필시 일본에서 말하는 철도경찰관에 해당하는 듯, 고함을 치거나 조크를 날려 사람들을 웃기면서, 참으로 능란하게 군중을 차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이윽고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내 자리로 왔다. 필경 의중이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리라.
먼저와는 전혀 다른 웃는 얼굴로, 이건 좋은 카메라군, 얼마나 하나? 라고 묻는다. 이렇게 되면 그의 내심은 분명해진다. 너무 분명해서 미워할 수조차 없다.
그는 매우 풍채가 좋았고, 중국인에게는 드믄 훌륭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 고참 하사관이라는 느낌이었다.
악습에 대해서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지불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물끄러미 그의 풍채를 바라보고는, “당신은 관우(關羽) 같소” 라고 자못 감탄한 듯 말했다.
언뜻 생각난 말이었지만 이 한마디가 먹혀들었다. 그는 가가대소하더니 다음엔 무척 무안해 하면서 내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삼국지의 무장 관우는 신격화될 정도로 중국서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런 말을 들은 것이 무척이나 기뻤는지, 관우가 뇌물 같은걸 받으면 쪽팔린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뇌물 대신 세븐스타 한 곽을 내밀자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식당차로 가자고 한다. 차내는 금연이었는데 자기와 함께라면 피워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한 대 피우고, 그는 빗나간 의도를 얼버무리듯 훌륭한 한자를 냅킨에 내리썼다.
연주불분가(煙酒不分家), 담배와 술은 모두의 것, 이라는 중국 격언이다.
원래 그에게 악의는 없었는지 모른다. 일본인이 신기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당당한 체격을 보나, 풍성한 수염을 보나, 아마도 그는 명망 높은 만주족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중국과 중국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소”
내가 말하자 그는 즉각 대답했다.
“나도 일본인을 존경하는데, 만날 기회가 없어 잘 모른다오”
하긴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차장에게 찍어 달랜 그와의 두 컷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 이름도 주소도 묻지 않는 걸 새삼 후회하고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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