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슈사쿠(遠藤周作)의 "용기 있는 말" 중에서 (2)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책 정리를 하다가, 작년 봄에 이 책에서 두 꼭지를 번역해 올렸던 생각이 나
다시 내용을 훑어 보면서 흥미있는 대목을 골라 더 올리고자 합니다.  

 

* 조삼모사(朝三暮四)
예날 중국에 원숭이를 좋아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원숭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비용이 너무 들어 어찌할 수가 없어지자 먹이를 줄이기로 하고, 원숭이를 향해
‘오늘부터 먹이로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한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나이는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하면 어떻겠니?’ 라고 말하니 원숭이들이 납득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든,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든 결국 같은 수의 먹이밖에 하루에 얻지 못하는데, 원숭이들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조삼모사란 이런 사기술을 이른다.
우린 원숭이들의 어리석음을 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부는 오늘까지 이 조삼모사 방법을 곧잘 국민에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 내각이 내거는 감세가 그것이다. 자못 감세를 하고 있는 듯 보이면서 딴 곳에 세를 걸어 뚫린 구멍을 막는다. 이 바꿔치기 전술은 정부가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일본 열도 개조론에 의한 물가고를 어느 틈엔가 석유 쇼크에 따른것인양 바꿔쳐서 원인을 흐지브지해버렸다. 우린 참으로 많이 걸려들었지.
일본의 내각개조도 조삼모사적 바꿔치기 전술임을 누구나 알아차리고 있다. 처음에는 미키(三木), 후쿠다(福田)의 진언을 분단시키기 위해 기획한 내각개조를 또다시 국민의 관심사를 예의 문춘 문제로부터 일시적으로 비켜 놓기 위해 이용한 듯 한데, 결과가 역으로 나타난 건 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중략-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예로부터 정치가의 조삼모사 바꿔치기 방법에는, 자신들에게 있어 그다지 건드리기 싫은 일이 있으면 그 시기의 다른 사건을 커다랗게 보도, 그쪽으로 민증의 관심을 쏠리도록 하는 게 있다. 까딱하다가는 새로운 뉴스를 쫓는 매스컴이나 저널리스즘도 이 방식에 걸려들기 마련으로, 예를 들어 오키나와 문제가 한창 논의중일때 적군파의 린치사건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실려, 매스컴도 국민도 멍청하게 그 쪽으로 눈을 돌렸던 예가 있다. 그 때 일의 본질을 확실하게 해 놓았다면, 이제 와서 라로크 증언등에 시끄러워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스컴 관계자도 무엇이 금주의 소중한 문제인가를 살피고, 그저 새로운 뉴스쪽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향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뉴스란 새로움이 반드시 능사가 아님으로.
 
* 촌놈이 씨 뿌리면 까마귀가 쑤셔댄다 (ゴンベエ種まきゃ烏がほじくる)
여러분. 내가 보증하건대, 지금부터 내년 2월에 걸쳐 여러분은 자신의 동네에서 반드시 이런 광경에 접할 것이다.
우선 그 동네의 길이 파헤쳐진다. 가스관을 까는 공사다. 파헤쳐진 땅은 지저분해지고, 비 때문에 진흙투성이가 되며, 또 이 공사로 일방통행이 되기 때문에 차도 사람도 불편해진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온순함으로 이것도 가스관 때문으로 생각하면서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반달가량 불편을 참아내면 공사가 끝나고 트레일러가 와서 다시 길을 고친다.
이제 겨우 불편이 해소되었군, 우리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또다시 애써 깐 아스팔트길을 파헤치는 걸 보고 우린 깜짝 놀란다.
‘얼마 전에 고친 길을 왜 부수는거요?’ 하고 우린 공사 감독자에게 묻는다.
‘하수도 공삽니다’
‘네?’
‘하수도 공사를 하는거라구요’
그래서 다시 길은 더럽혀지고, 진흙투성이가 되고, 일방통행이 시작된다. 모두들 아무소리 없이 참는다.  그리고 그 공사도 겨우 끝나 트레일러가 또다시 길을 고친다.
‘어이구’
아니, 어이구 하긴 아직 이르다. 또 얼마 안 있어 길이 파헤쳐지기 때문이다.
‘이번엔 뭡니까?’
‘수도공사요’
‘네에?’
그리고 또 겨우 깐 아스팔트길에 구멍이 뚫리고 일방통행이 된다.
이런 광경을 한번도 보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걸 보면서 ‘촌놈이 씨뿌리면 까마귀가 쑤셔댄다 ’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관공서에서 지난해 받은 예산을 올해에 사용하지 않으면 내년도 예산이 삭감된다. 예산이 삭감되면 큰일이니까 매해 예산을 받을 때가 되면 쓸데없는 공사를 일부러 해서 돈을 써버리는 것이다. 수도관도 하수도관도 함께 공사를 하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을 따로따로 한다. 별도로 하니까 그 때마다 고친 아스팔트길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파헤쳐지는 것이다. 같은 공사를 몇 번씩 한다. 참으로 이런 쓸데없는 돈 낭비는 없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금 낭비다. 그걸 관공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해마다 이런 바보짓을 거듭하는지, 우린 전혀 알수가 없다.
‘촌놈이 씨 뿌리면 까마귀가 쑤셔댄다 ’. 수도국이 길을 고치면 다른 관청이 그걸 파헤친다. 책임 있는 사람의 답을 경청하고 싶다.
(편집부주) 뭐 세금을 바치는 우리 쪽에서 대답하자면, 자기 몸 꼬집어 남의 아픔 알라, 지요.

 

* 문답무용(問答無用)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문답무용이라는 말로 생각나는 건 五・一五 사건 때 한사람의 장교가 뱉은 이 말이다.
청년장교들이 인솔한 무리들은 그날 어느 정부고관의 사제에 난입하여 침실에 숨어있던 고관을 찾아냈다. ‘이야기 나누면 알 것이다’ 라고 필사적으로 고함치는 그 고관에게 청년장교는 ‘문답무용’이라 답하고 그 자리에서 사살한 것이다.
전후, 민주주의란 대화 정치라고 곧잘 말들을 하면서, 그 때마다 五・一五 사건의 이 유명한 말을 예로 들고, 민주주의란 문답무용과 같은 사고방식의 부정이라고 일컬어왔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자신의 생각은 지키되, 동시에 타인의 발언에 대한 자유도 존중하는 일이라고 우리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시기가 있었다.
오늘날, 이 청년장교와 같은 ‘문답무용’이란 사고방식을 가진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조소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느날 밤 나는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중 다음과 같은 장면을 발견했다. 중년의 보수당 대의원과 평론가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였다,
내가 이때 재밌다고 느낀 건, 평론가가 뭔가를 이야기하면 청년들은 ‘맞아, 그렇죠’ 라거나, ‘동감’ 이런 소릴 하면서 그 발언에 귀를 기울리는데, 보수당 대의원이 입을 열면 즉각 노성인지 야유인지 모를 고함 소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노성과 야유 가운데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넌센스’ ‘바보야’ ‘뭔 소릴 하는거야’ 같은 질책의 언어였다.
보수당 대의원은 그 때마다 얼굴이 굳어지면서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하지만, 보기에 그저 딱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 난 불쾌했다. 이 보수당 대의원의 발언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나, 불쾌했던 것은  ‘넌센스’ ‘바보야’ 라는 매도 야유의 언어를 쏟아내는 청년들의 태도였다. ‘넌센스’라는 말이 내게는 일본어 ‘문답무용’과 같은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반동 정치 속에서 지키고자 하는 의욕은 이해한다고 쳐도, 그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타인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근본 룰을 거리낌 없이 침범하고 있다는 게 불쾌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그들에게는 상대를 조용히 설득하는 언어의 훈련이 부족하여, 그런 무능력을 야유, 노성, 매도등으로 메꾸려는 태도가 불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장면은 이 텔레비전 프로뿐만이 아니다. 어떤 민주주의 운동의 회의나 모임에서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걸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가.
 (편집부주) 별로 주석을 할 게 없는 듯 합니다.
*五・一五사건: 1932년년(쇼와7년)5월 15일에 일본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무장한 대일본제국 해군의 청년장교들이 총리대신 관저로 난입, 내각총리대신 이누가이(犬養毅)씨를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