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随筆] 솔바람 소리(松風の音) : 와쯔지데츠로(和辻哲郎)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도쿄 교외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으면 때때로 솔바람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근처에 소나무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모두 어린 정원목으로, 솔바람의 싱그러운 울림을 전해주는 당당한 거목은 거의 없다. 대신하는 것은 커다란 느티나무로, 전쟁 이후 대부분 잘려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절반 정도는 남아있다. 이 느티나무가 바람이 조금 이는 날에는 높은 가지 쪽에서 일종의 특이한 울림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건 솔바람 소리와는 많이 다르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는지, 좀 어려운데, 실제로 울림 그 자체가 상당히 다를 뿐더러, 그걸 들었을 때 유연하게 일어나는 기분, 그에 따른 연상 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울림 그 자체가 다른 것은 그 울림을 일으키는 소나무의 모양과 느티나무의 모양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직접 소리와 관계되는 것은 잎이라고 생각하는데, 소나무 잎은 초록색 바늘 같은 모양으로, 사실 낙엽수의 부드러운 잎은 바늘처럼 찌를 수가 있다. 잎맥이 세로로 늘어서 있고, 잎 뒤에 송진이 나온다는 하얀 작은 점이 가느다란 백선처럼 보인다. 실로 강인하며, 또 벌레에 먹히지 않는 강건한 잎이다. 그에 비해 느티나무 잎은 느티나무가 거목인데도 어울리지 않게 작고 순한 모양으로, 봄에 새눈을 틀 때도 다른 낙엽수보다 늦게 뿌연 연두색으로 나타나며, 가을에는 다른 낙엽수보다 먼저 깨끗이 누르스름한 잎을 떨어뜨려버린다. 이러한 대조는 상록수와 낙엽수에 그치지 않고, 강(剛)과 유(柔)의 극단적인 대조처럼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지가 달린 모양이다. 소나무 가지는 줄기에서 옆으로 나와, 강한 탄력에 의해 상하좌우로 흔들리는데, 느티나무 가지는 줄기를 따라 위를 향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가지 끝으로 가면 어느 게 줄기이고 어느 게 가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이를테면 빗자루 같은 형태로 가지가 나뉘어져 있다. 느티나무이니 탄력은 역시 강할 것이다. 그래도 이 가지는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일은 있어도 상하로 흔들리는 일은 절대로 없다. 솔바람 소리는 위와 같은 소나무 잎이 위와 같은 소나무 줄기에 몇천 몇만개가 늘어서 있어, 바람에 따라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울림이나, 느티나무의 바람소리는 위와 같은 느티나무 잎이 위와 같은 느티나무 줄기에, 마찬가지로 몇천 몇만개가 늘어서 있는 것이 바람에 따라 그저 전후로만 움직여 일어나는 울림이다. 그게 상당히 다름은 당연하다고 해도 좋으리라.
솔바람 소리에 따라 일어나는 연상은 바둑 두는 소리이다. 높직한 곳에 있는 절의 주지스님 방 같은 곳, 둘레에는 높은 소나무가 있고, 그 가지 쪽에서 상큼한 솔바람 소리가 전해져 온다.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대좌하고 있는 건 이 절의 주지와 아랫마을의 지주로, 어느 쪽도 아직 환갑에는 이르지 않고 있다. 때는 한여름 오후, 서너시쯤이다. 둘이는 아무 말도 없다. 그저 가끔 톡 톡 돌을 놓는 소리만 난다.
나는 이 절이 어디인지 모른다. 또한 바둑을 두고 있는 주지와 지주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솔바람 소리를 생각하면 그런 광경이 머리에 떠오른다. 바둑알 소리가 뭔가 세상일에 초연한 존재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솔바람 소리는 그런 존재의 반주인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런 주지나 지주가 농촌의 지식계급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났으니 그런 사람들은 이제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혹시 그런 종족 가운데 살아남아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생활은 이제 허락되지 않으리라. 그래도 그런 존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희랍인의 이른바 스코레(짬)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터이니.
---
*和辻哲郎(와즈치테츠로, 1889-1960年)
『古寺巡礼』 『風土』 등의 저작자로 알려진 일본의 철학자, 윤리학자, 문화사가,
일본사상사가. 그의 윤리학 체계를 와즈치윤리학이라 부른다.
---
東京の郊外で夏を送っていると、時々松風の音をなつかしく思い起こすことがある。近所にも松の木がないわけではないが、しかし皆小さい庭木で、松籟(しょうらい)の爽(さわ)やかな響きを伝えるような亭々(ていてい)たる大樹は、まずないと言ってよい。それに代わるものは欅(けやき)の大樹で、戦争以来大分伐(き)り倒されたが、それでもまだ半分ぐらいは残っている。この欅が、少し風のある日には、高い梢の方で一種独特の響きを立てる。しかしそれは松風の音とは大分違う。それをどう言い現わしたらいいか、ちょっと困るが、実際に響きそのものが相当に違っているばかりでなく、それを聞いたときに湧然(ゆうぜん)と起こってくる気分、それに伴う連想などが、全部違っているのである。
響きそのものが違うのは、その響きを立てる松の姿と欅の姿とを比べて見れば解る。直接音に関係のあるのは葉だろうと思うが、松の葉は緑の針のような形で、実際落葉樹の軟らかい葉には針のように突き刺すことができる。葉脈が縦に並んでいて、葉の裏には松の脂(やに)が出るらしい白い小さい点が細い白線のように見えている。実際強靭(きょうじん)で、また虫に食われることのない強健な葉である。それに比べると、欅の葉は、欅が大木であるに似合わず小さい優しい形で、春芽をふくにも他の落葉樹よりあとから烟(けむ)るような緑の色で現われて来、秋は他の落葉樹よりも先にあっさりと黄ばんだ葉を落としてしまう。この対照は、常緑樹と落葉樹というにとどまらず、剛と柔との極端な対照のように見える。が一層重要なのは枝のつき工合である。松の枝は幹から横に出ていて、強い弾力をもって上下左右に揺れるのであるが、欅の枝は幹に添うて上向きに出ているので、梢の方へ行くと、どれが幹、どれが枝とは言えないようなふうに、つまり箒(ほうき)のような形に枝が分かれていることになる。欅であるから弾力はやはり強いであろうが、しかしこの枝は、前後左右に揺れることはあっても、上下に揺れることは絶対にない。松の風の音は、右のような松の葉が右のような松の枝に何千何万と並んでいて、風によって上下左右に動かされて立てる響きなのであるが、欅の風の音は、右のような欅の葉が右のような欅の枝に同じく何千何万と並んでいて、風によってただ前後にだけ動かされて立てる響きなのである。それが非常に違うのは当然のことだと言ってよい。
松風の音に伴って起こってくる連想は、パチッパチッという碁石の音である。小高いところにあるお寺の方丈か何かで、回りに高い松の樹があり、その梢の方から松籟の爽やかな響きが伝わってくる。碁盤を挟んで対坐しているのは、この寺の住持と、麓の村の地主とであって、いずれもまだ還暦にはならない。時は真夏の午後、三、四時ごろである。二人は何も言わない。ただ時々、パチッパチッと石を置く音がする。
わたくしにはこの寺がどこであるか解らない。また碁を打っている住持と地主が誰であるかも解らない。しかしいつのころからか、松風の音を思うと、そういう光景が頭に浮かんでくる。碁石の音が、何か世間に超然としている存在を指しているように思える。松風の音はそういう存在の伴奏なのである。
わたくしの子供の時分には、こういう住持や地主が農村の知識階級を代表していた。その後半世紀を経たのであるから、そういう人たちはもう一人も残っていないであろう。たといそういう種族のうちで生き残っている人があるとしても、そういう生活の仕方は、もう許されなくなっているであろう。しかしああいう存在はあっていいと思う。あれもギリシア人のいわゆるスコレー(ひま)を楽しむ一つの仕方であろう。
'번역 [飜譯] > 일한번역 [日韓飜譯]'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키(村上春樹)의 21일간 터키 일주 (3) (0) | 2014.05.14 |
---|---|
엔도슈사쿠(遠藤周作)의 "용기 있는 말" 중에서 (1) (3) | 2014.05.11 |
하루키(村上春樹)의 21일간 터키 일주 (2) (0) | 2014.04.21 |
무라카미하루키(村上春樹)의 21일간 터키 일주 (1) (2) | 2014.04.16 |
[아기아・안나 ㅡ 안녕 아토스] (村上春樹)의 그리스 기행문 (2) | 2014.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