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렌자부로(柴田錬三郎의 수필 중에서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죽음에 대하여 

인간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다. 불로불사(不老不死) 여부에 관계없다는 법칙이다. 나는 일본인의 평균수명이 얼마만큼 늘어났는가 하는 통계만큼 바보스러운 건 없다고 생각한다. 도쿄대 출신인 쪽이 사립대 출신보다 사장이 되는 비율이 높다는 등의 통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죽음의 신은 인간의 연령, 능력, 성정(性情) 등의 선악과는 관계없이 갑자기 달려든다. 공사 중 빌딩 곁의 보도를 20대 젊은이와 70세 노인이 지나간다. 잘못하여 철골이 낙하하였는데, 젊은이가 맞고 노인은 요행이 위험에서 벗어난다. 죽음의 신이란 이처럼 제멋대로인 것이다. 평균수명이 70세가 되었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 나이까지 살 수 있다고 정해지는 건 아니다.

내 친척 가운데, 건강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매일 두 시간씩 낮잠을 자고, 한 시간 산책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양치질을 하는, 사실상 건강 그 자체였던 사람이, 어처구니없게도 매일 양치를 계속하던 목에 암이 생겨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확실히 중년을 넘으면 고속도로를 스포츠카로 질주하지는 않고, 겨울 호다카(穂高)산에 기어오르려고도 하지 않으니, 그런 점에서 사망의 위험 비율은 낮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신이 끊임없이 우리의 배후를 서성이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젊은이에게 죽음이란 지극히 먼 것이다. 나의 20대는 전쟁의 한가운데였고, 나 자신 군대에 끌려가서 두 번 가량 죽음과 직면하였으나 아직도 나는 자신이 세상과 안녕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갑판에 고사포를 비치한 수송선 병사였던 나는 대만 가오슝(高雄)의 항만 내에서 전우와 나란히 선수의 구리 닻 뒤에 누어서 매춘부를 사는 이야기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한 번도 적기 내습의 경보가 울리지 않았고, 군인들도 선원도 모두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돌연 구름 사이에서 소리도 없이 (확실히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먼기 한 대가 급강하하여 우리 배의 갑판을 재봉틀로 박듯 기총소사를 한 뒤 잽싸게 구름 사이로 숨어버렸다.

겨우 수초 동안의 일어난 일이었다.

나에게 공포 의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어이가 없는 상태로 비행기 모습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면서, 아아, 가버렸구나, 하는 기분으로 일어서다가 섬뜩했다. 나란히 누어있던 전우가 시체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만약 1미터만 오른쪽으로 기총소가가 가해졌다면 내가 죽었고 그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을 갖게 되면 평균수명이 몇 년이나 늘었다는 등의 통계가 참으로 멍청하게 느껴진다.

시라노 드 벨쥬락은 아니지만, 별안간 데리러 온 사신에 대해 저항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다. 하다못해 시라노처럼 죽음의 신도 빼앗을 수 없는 ‘마음가짐’만은 꼭 안고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고 바라기는 하나, 어차피 범부이니, 드디어 그 때가 오면 ‘살려줘!’ 하고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칠 것 같다.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평균수명에 손이 닿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후생성은 쓸데없는 숫자를 공표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 노인에 대하여

앞서 죽음에 대해 썼으니, 이어서 이번 회에는 노인에 대해 쓰고자 한다.

70세를 옛날에는 고희(古稀)라고 했다. 예전엔 드믈도록 오래 살았으니 본인도 그렇게 여기면서 인생을 완전히 깨달은 듯 모든 욕망을 버린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다시말해 심신 모두 말라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70세가 되어도 여전히 30대 40대의 젊음을 보존하는 일이야 말로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70년이나 살면 보통은 색욕도 물욕도 자연히 쇠퇴되는 게 당연한 일이기는 하되, 욕망은 조금도 쇠퇴되지 않고 오히려 왕성하게 하려는 인간이 예나 지금이나 드물지 않겠는가.

 

피카소가 만년에 남녀의 음부를 노골적으로 그린 것은 그가 자기는 [노인]이 아님을 주장한 증거다. 피카소는 거실에 커다란 바구니를 놓아두고 거기다가 세계 각국의 지폐를 산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지인이 찾아오면 거실로 불러들인다. 그 지폐더미를 본 방문객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만져보고 싶어지는 게 인정, 순간 피카소는 만져보려는 그 손을 찰싹 때리면서 [만지지마!] 하고 고함친다.

즉, 피카소는 방문객이 지폐더미로 뻗는 손을 때리고 싶어서 그런 속된 짓을 하는 것이다. 노령과의 장렬한 싸움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19세에 파리를 찾아, 20세기의 [거인](실제의 피카소는 1미터 50센티 될까말까의 소인이었지만)이라고 불릴 만큼의 거장이 되었고, 그 같은 최고봉의 자리를 견지하면서 90세가 된 그는 최후의 1초까지 [노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유서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연령은 [노인]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문장의 삽화를 담당해 주고 있는 이와다센타로(岩田專太郞)씨는 화업(畵業) 반세기를 거치면서도 계속 이처럼 묘사가 젊고 싱싱하다. 50년 전의 삽화와 비교할 때 지금의 것이 오히려 생기 넘친다. 이와타씨 자신, 복장도 청년이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노인스러운 곳이 티끌만큼도 없다.

20대, 30대에 이미 완전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생기를 상실한 [노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이 이대로 30년, 40년 더 산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연령을 더함에 따라 늘 지치지 않는 욕망에 불타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설령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 행동이 악덕일지라도...

[이제 난 나이가 나이인 만큼]이라던가, [나잇값도 못한다]든가-- 그러한 의식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그 순간 [노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신 모두 말라버린 명승의 선(善) 지식을 사나이 만년의 이상상(理想像)으로 하는, 당치도 않은 잘못된 생각을 우리들은 강요당했다. 노령이 되면 욕망이 희박에지는 게 자연의 이치이며, 욕망이 없어져버린 중 따윈 별로 잘나지도 않았다.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인]이 되지 않도록 기이할 정도의 노력을 쏟는 것이 참된 미덕이라는 것이다. 라·로슈프코가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인간의 미덕’이라는 건 위장된 악덕에 지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