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과 30년 - 타치하라마사아끼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올 여름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비 안오는 더운 날이 계속되고, 전철의 냉방으로 목이 나빠진 건 7월 중순이었다. 한때 좋아졌는데, 하순에 칸사이(關西) 다도회에 갔을 때 신칸센(新幹線)의 냉방 때문에 다시 나빠져서 10월에 들어섰는데도 전혀 낫지를 않는다. 그 밖에도 좋지 않은 곳이 생겨 여름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매해 9월 중순이라는 말을 들으면 뒷산으로 오이풀을 찾으러 간다. 오이풀은 햇볕이 잘 드는 장소에 피어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다. 올해는 20일이 지나서야 산에 갔더니 풀과 함께 배어버렸는지 늘 있던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실망하면서 다른 장소를 걸으며 찾아보았으나 오이풀은 없었다. 돌아오면서 억새를 꺾어다가 병에 집어넣었다. 오이풀과 억새로는 가을을 받아들이는 법에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수용한 것에는 다름이 없다. 속된 문학논쟁을 소홀히 하고 풀꽃을 찾아다니다니 퇴영적(退嬰的)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난 내년에도 살아있다면 또다시 오이풀을 찾으러 산에 들어갈 것이다.
2차 대전 말기, 나는 초연이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일본이 망하고 한국이 망하기를 절실히 바랐다. 그 이외에는 믿을 게 없었다. 나의 전후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여생을 살아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초기 작품 <쓰루기가사끼(劍ヶ崎)>도 <타키기노오(薪能)>도 이 멸망의식에서 탄생되었다. 여생을 살아왔다고 했지만 적당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다. 살아가는 게 절실했다. 자아가 상대를 집어삼키듯이 힘든 삶을 살아오던 젊은 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오이풀에 스스로를 몰입시키던 세월이었다. 초연이 가득하던 시절에는 일본과 한국에 대해 반대감정이 양립하는 갈등이 있어, 그 때문에 두 나라의 멸망을 절실하게 원했으나, 전후에는 그런 앰비벌런트(ambivalent-양면적)의 갈등은 사라지고 오이풀만이 보이게 되었다.
더더구나 민주주의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특공대원이 공산당원이 되는 시대였으니 그러한 세계를 믿을 수는 없었다. 일본인이 민주주의로 동일화되어 일체감을 얻고자 할 때 나는 로쿠온지(鹿苑寺)나 지쇼지(慈照寺)를 생각하고, 태평시대의 불상을 떠올렸다. 그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마주하고 있어도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수평적 거리나 수직적 거리 없이 한없는 안도감만이 있었다. 아름다움의 딱딱함과 부드러움은 늘 종이 한 장 사이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현재의 무상(無常)을 보고 있는 자에게 있어 스스로를 투영시킬 수 있는 건 그곳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일종의 자기 도야였다.
요 몇해 나는 때때로 야마토지(大和路)를 걷는다. 불당을 자주 찾고, 부처와 재회하며, 특히 사람이 없는 겨울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가끔씩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걸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은 느낀다.
어느 해였던가, 겨울의 호류지(法隆寺) 경내에서 불상도, 도자기도, 오이풀도,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있다. 필경 오해를 살 듯한 말투인데, 관조(觀照) 결과 미적인 향수(享受)가 있어 나의 내부로까지 침투한 대상이 한 소설가의 인격을 형성시키는데 기여 또는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이러한 해석도 성립될 것이다.
또 어느해 여름, 아키시노데라(秋篠寺)에서 나오다가 전후 30년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기게이텐(伎藝天)은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나는 30세나 나이를 먹었군. 기게이(伎藝)란 이름을 그리워하면서 시골길을 찾아갔더니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미녀가 있었다. 그건 전후의 어떤 소리 높은 언행보다 확실했다. 지쇼(治承) 4년, 열아홉살의 사다이에(定家)가 겐페이(源平)의 패권다툼에서 [紅旗征戎非吾事]라는 가인으로서의 뜻을 일기에 적었는데, 젊은 날 처음으로 기게이텐과 만났을 때 내가 사다이에를 떠올린 것은 의미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가끔씩 아키시노데라를 찾으면서 난 자신이 확실하게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보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키시노데라를 찾았을 때, 전후의 30년을 생각 한 것은 대상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단 한가지 때문이다.
남는 건 남고 도태되는 건 도태될 것이다. 나의 전후는 불상과 도자기와 오이풀과의 사귐으로 시작되었는데, 오래전에 일본문예가협회와 일본펜클럽으로부터 빠져나온 이후는 점점 퇴영적(退嬰的)이 되어 가는 모양이다. 이 원고를 다 쓰고 난 뒤 나는 다시 나라(奈良)로 가는데, 다름 아니고 그 곳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秋篠寺
伎藝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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