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村上春樹)의 [칼라카르 수도원] -속-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저녁식사후 마슈가 수도원 밭을 안내해주었다. 밭에는 토마토랑 가지、캬베츠, 파 등이

자라고 있었다. 보기에도 매우 풍요로운 토양이듯 하다. 틀림없이 비가 많이 오니 야채

재배에 적합하리라. 땅거미가 짙어지자 그에 호응하듯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먼 천둥인데 소린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또 구름이 슬슬 나타난다. 내일 날씨가 걱정이군,

생각하고 있는데 후두두둑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맙소사...

 

우리들은 방으로 돌아와 빗소리를 들으면서 다프니의 잡화점에서 산 붉은포도주를 따서

마셨다. 싸구려 와인이지만 몸이 알코올에 굶주려있었던 탓인가 무척 맛있게 느껴진다.

침대가 3개 있을 뿐인 좁은 방, 빛이라곤 작은 석유램프 하나뿐이다. 전기는 없었다.

장실은 수동 수세식이었다. 다시 말해 곁에 있는 호스로 흘려보내거나 아니면 스스로

양동이에서 물을 퍼, 그걸로 좍 내려보내는 거다. 간단했다. 화장지는 내려가지 않으므로

곁에 달린 통에 버려야 하는데, 이 시스템은 아토스뿐만 아니라 그리스 어디에서든

쓰는 방법으로, 익숙해지면 별로 편하지도 않다.

 

석유램프 빛 아래서 약간 껄끄러운 특유의 맛을 지닌 그리스 와인을 마시는 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끔씩 천둥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이 근방에서는 자주

번개를 맞아 수도원이 불탄다고 마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옆 동도 몇 달 전에 낙뢰로 불타 버렸다는데, 아직도 시커멓게 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비뿐만 아니라 번개도 많은 땅인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벼락을 맞아

시커멓게 타 죽는건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덟시경 누군가가 문을 조용히

노크했다. 열어보니 마슈였다.

[이것도 가지고 가시지요] 하면서 포도와 양파와 피망을 넣은 주머니를 건네준다.

정말로 친절한 남자였다. 아홉시에 우리는 램프를 끄고 잠들었다.

 

한밤중의 종소리로 눈을 떴다. 기묘한 울림을 내는 종소리였다. 기묘한 리듬과

기묘한 음정. 시계를 보니 오전 2시 20분이다.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에는 목탁같은 소리가 났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기묘한 리듬과 기묘한 음정을

내고 있다. 마슈가 말했던 대로다. 이어 예의 사만도론이라는 프로펠라형 달리는

목탁이 탁탁 탁탁하고 울렸다. 멀리서부터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온 다음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간다. 소리의 음직임으로 보아 사만도론을 두드리는 자는 상당한

스피드로 달리고 있는듯 했다. 그러나 타법은 힘찼으며 리듬에 흐트러짐이 없다.

그것이 어떤 소리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건 우리가 통상적으로

귀에 담는 소리와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건 짧고 거리낌 없는 명쾌한 소리였다.

소리는 엄격하게 탁 탁 밤을 때린다. 단숨에 밤의 어둠을 가르고 우리의 귀에 닿는다.

 

내게는 신앙심이라는 게 별로 없으나, 그래도 그 소리에 담겨있는 어떤 종류의

심적인 메시지 같은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리의 울림만은 테이프에 담아서

들려준다 해도 필경 전달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모든 상황을 품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울리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토스의 깊은 밤의 어둠, 침묵, 우리와는 다른 시간성, 하늘에 꽉 찬 별들.

수도원 승려들이 이 동에 모여있는듯 했다. 계단으로 올라가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우리가 묵고 있는 이 건물의 나무 복도는 몹시

헐어서(붕괴 직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걸을 때마다 숙명적인 소리로

삐걱거린다. 게다가 널판과 널판 사이가 벌어져서 그리로 노란 촛불 빛이 줄처럼

흘러나온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불규칙한

빛줄기만이 천정으로부터 내려왔다. 우리가 자고 있는 곳은 2층인데, 아무래도

한층 위에 한밤중의 예배실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일어나서 작은 회중전등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가봤다. 캄캄한 복도 안쪽에서

승려들이 손에 든 촛불 빛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게 보인다. 그들은 삼삼오오

계단을 올라 윗층으로 사라진다. 그들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면서 살짝 위로 올라가

보니 계단 가까이에 작은 예배소가 보였다. 낭낭한 기도소리가 들렸다.

촛불 빛이 붉게 타고, 모인 승려들의, 밤의 어둠에서 빠져 나온듯한 시커먼 흑의가

보인다. 그건 솔직히 말해 장엄하다는 것 보다 뭔지 모르게 으스스했다.

 

나는 종교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지식을 지닌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그리스 정교라는 종교에는 어딘가 모르게 이론을

뛰어넘은 동방적인 위협을 받는 경우가 있는듯이 느껴진다.

특히 한밤중의 예배를 계단 구석에서 살그머니 엿보고 있는 경우, 거기에는 확실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가릴 수 없는 역학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럽과

소아시아가 역사의 근본에서 타협하는 듯한, 근원적인 다이나미즘.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더 신비적인 토속적 육체성을 갖추고 있는

듯하게 느꼈다. 더욱 깊이 들어가 말하자면, 그리스도라는 불가사의에 쌓인

인간의 소아시아적 기이함을 다이렉트로 이어받은 것이 그리스 정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나는 계단에서 한동안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우리고 있다가, 왠지 방해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여 마당으로 나가봤다. 비는 그치고 밤하늘은

명쾌하게 맑아져있었다. 구름 한점 없이, 마치 프라네타리움처럼 구석 구석

선명한 별들로 뒤덮여있었다. 30분쯤 그곳에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이로써 오늘도 필경 좋은 날씨가 될것으로

생각하면서 난 마음을 놓았다. 멀리서 함께 올리는 승려들의 기도소리가

나의 귀를 부드럽게 채워주어 잠시 후 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