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21號: 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 삼층석탑 - 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第21號 : 佛國寺三層石塔
所在地 : 慶北慶州市佛國寺內
時代 : 統一新羅
佛國寺は統一新羅景德王10年(751)に創建された寺刹で, 過去·現在·未來の仏が住む淨土,
即ち理想鄕を具現しようと試みた新羅人の精神世界がうまく表現されたお寺と言える.
『三國遺事』によると宰相金大成が、石窟庵は死後の両親のために, 佛國寺は逝前の
父母のために建て始めたがが、惜しくも死亡する前まで完成できず、後に国で完成させ、
福を祈る寺にしたという.
佛國寺三層石塔と佛國寺多寶塔(國寶第20號)は、寺の大雄殿の前庭東西側に建っており,
西側の方が三層石塔である.
塔の本名は ‘釋迦如來常住設法塔’だが, いまは‘釋迦塔’と短く呼ばれている.
二つの塔を同位置に建てた理由は、‘現在の仏’の釋迦如來が說法するのを
‘過去の仏’多寶佛が、側で、正しいと證明する『法華經』の內容に基づく.
この塔は、2層の基壇の上に3層の塔身を重ねた形になっている.
感恩寺址三層石塔(國寶第112號)や高仙寺址三層石塔(國寶第38號)を最初に、
8世期中期に到る頃絶頂に達した、統一新羅石塔樣式の敎科書と云えるほどの
立派な作品である.
塔全體の重さを支えるために2層の基壇をしっかりと組み立て, 木造建築を真似て
上下層の基壇の角毎に石を削り柱模様を作った.
塔身にも同様の柱を刻み, 屋根石の角は共に上に反り返り、塔全體に颯爽と
舞い上がる感じを持たせた.
塔の基壇と塔身は特別な飾りをつけず簡潔に組み上げたのに対し、3層の
屋根石の裝飾は華やかさを持たせている.
これは1973年、釋迦塔より100年も後に造られた南原實相寺三層石塔(寶物第37號)の
頭裝飾を真似て復元を行ったためである.
塔の回りに置いた礎石には蓮文様が刻まれているが, これは仏の舍利を入れておく
清らかなところを示すものと解釋できる.
他の処では見られない特徵で, これが塔の莊嚴さを一層高くさせている.
塔が造られた時期は、佛國寺が寺の規模を整えた頃, すなわち寺が創建された
年代の景文王10年(751)以後と推測している.
その後ずっと元形通り保存されて来たが, 残念にも1966年9月、盜掘者によって
塔が損傷されてしまった.
同年12月、塔を完全に復元する際、2層塔身の身石の前面に仏の舍利を保存する
四角形の空間が發見された.
ここから様々な舍利容器や遺物が出てきたが, 其のなかで特に目を惹いたのが
『無垢淨光大陀羅尼經』(國寶第126號)だった.
これは世界で最も古い木版印刷物で、楮紙で作られており, 現在國立慶州博物館で
保管している.
この塔は ‘無影塔:陰が写らない塔)’とも呼ばれているが, それには、釋迦塔を造る
百濟の石工、阿斯怛を訪ねて、新羅の都ソラボルヘ來た阿斯女が、夫に逢うこともできず
湖水に身を投げた悲しい傳說からきたものである. (文化財廳)
국보 제21호: 불국사 삼층석탑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대 :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을 시작으로 하여
8세기 중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기단과 탑신에 특별한 꾸밈을 두지 않고 간결하게 짜여진 것에 비해 3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는 1973년에 석가탑보다 100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
(보물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이로 인해 탑의 장엄함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불국사가 절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던 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아, 절을 창건한 연대인 경문왕 10년(751) 이후로 보고 있다.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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