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20號 : 佛國寺多寶塔 불국사다보탑 - 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第20號 : 佛國寺多寶塔 불국사다보탑
所在地 : 慶北慶州市佛國寺內
時代 : 統一新羅時代
佛國寺は統一新羅景德王10年(751)に創建された寺刹で, 過去·現在·未來の仏が住む淨土,
即ち理想鄕を具現しようと試みた新羅人達の精神世界がうまく表現されたお寺と言える.
『三國遺事』によると宰相金大成が、石窟庵は死後の両親のために, 佛國寺は逝前の
父母のために建てたが、残念にも死亡する前まで完成できず、後に国で完成させ、
福を祈る寺にしたという.
多寶塔と釋迦塔(佛國寺三層石塔,國寶第21號)は、わが国を代表する石塔で,同じ高さの
10.4メートルから成る. 境内の大雄殿と紫霞門前庭に向き合って東西に位置し,
東側が多寶塔、西側が釋迦塔である.
多寶塔は特殊な形の塔を, 釋迦塔はわが国の一般石塔を代表すると言えよう.
この二塔を同じところに建てた旨は、 ‘過去の仏’である多寶佛が、 ‘現在の仏’ 釋迦如來が
說法する際、側で正解を證明するとの『法華經』を真面に視られるよう、塔を以て
具現するためだったと伝える.
釋迦塔は2段基壇の上に建てた三層塔であることを容易に見分けられるが, 多寶塔は
層数を数えるのがややこしい. 十字形平面基壇の四方に石階段を設けて八角形塔身を載せ、
回りに四角の欄干を廻した.
塔の建立時期は佛國寺が創建された統一新羅景德王10年(751)と推測される.
木造建築の複雜な構造を斬新な發想を以てすっきりと表現した優れた作品で,
四角, 八角, 丸をもって一つにきちんとまとめた構成の見事さや、各部分の長さ·幅·奥行きを
一定に統一させた点など、8世紀統一新羅美術の精髓が窺われる.
1925年頃日本側で塔を完全解體して補修したため多寶塔に関する記録が残されていない.
また、塔内に入れてあったはずの舍利や舍利裝置, その他の遺物も残らず消えふせた.
なお、基壇の石段上に置かれた四匹の石獅子中、最も保存狀態が良かったと思われる三匹が
日帝に掠奪された。これらを取り戻すための努力を以前から続けているのだが
未だに行方が判らないのは残念だ.
불국사다보탑
종목 : 국보 제20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지정일 : 1962.12.20 시대 :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
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층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 기단은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은 그 주위로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여기에 대나무마디 모양의 돌기둥, 16장의 연꽃무늬 등을 새겼는데, 돌을 깎아
세운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또한 석가탑의 머리장식이 후에 복원한 것인 반면, 다보탑의 머리장식은 거의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탑을 세운 시기는 불국사가 대규모로 새롭게 단장을 한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았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출처: 문화재청>
'민속문양 [民俗紋樣]' 카테고리의 다른 글
國寶第22號 : 佛國寺蓮華橋七寶橋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0) | 2008.05.08 |
---|---|
國寶21號: 佛國寺三層石塔 불국사 삼층석탑 (0) | 2008.03.27 |
國寶19號: 浮石寺祖師堂 부석사조사당 (0) | 2007.12.26 |
高士濯足圖 고사탁족도 (0) | 2007.08.27 |
國寶18號:: 浮石寺無量壽殿 부석사무량수전 (0) | 200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