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   -   민속문양 [民俗紋樣]



安堅の「夢遊桃源圖」
絹の巻画・淡彩 38.7×106.0 cm
日本天理大學中央圖書館所藏 

安堅は、世宗大王時期に圖畵院の從6品から正4品にまで昇進された人だが, 朝鮮初期の畵院品階で、限界にあたる從6品を乗り越えて昇進した最初の持ち主でもある. 安堅は安平大君(世宗大王の3男)に仕えながら、安平大君が所藏していた古畵すべてを丹念に調べることで自分の畵風を創り出す土臺とした。

〈夢遊桃園圖〉は現在日本の天理大學中央圖書館に保管されているが, どのような手順を經て日本へ渡ったのか定かでない. 今まで追跡可能な範圍內で確めたことによると、〈夢遊桃園圖〉をもっとも長い間所藏した日本所藏家は九州鹿児島出身の島津久徵で, この人の生涯や活動に鑑み、少なくとも1900年以前すでにこの繪畵は日本へ渡ったことと見ている。

〈夢遊桃園圖〉は安平大君が世宗29年(1447)のある日夢みた武陵桃源を安堅に詳しく說明してあげたのを基に3日間で完成させた画だが, 國內外を問わず最も知れ渡った朝鮮繪畵であり、韓國繪畵史全般に至っても最高位置を占めている.
〈夢遊桃園圖〉には桃園の景色を寫した繪畵と共に、安平大君の跋文や大君の周りにいた朴彭年, 崔恒, 申叔舟など當時の優れた人物21名の自筆讚詩も書かれている. 其れ故〈夢遊桃園圖〉は繪畵作品ばかりでなく書藝作品としても, 又、當時安平大君を囲む重臣たちとの關係を調べる史料としても大きな意味を含んでいる.
いわば〈夢遊桃園圖〉は、安平大君が王子だからこそ味わねばならぬ苦しみを、自ら積極的に真正面から立ち向かい、様々な摩擦や葛藤、煩悶を払い除けようと志していたおりに、常に知っていた陶淵明の〈桃花園記〉の世界を夢で旅することになり、その素晴らしい理想世界を永遠に記憶しようと、彼が経験した様子を仔細に安堅に話し聴かせ、それを描かせたも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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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
두루마리/비단에 담채, 38.7×106.0 cm,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안견은 세종 때에 도화원의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인 정4품 호군으로 승진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의 화원으로서 품계의 한계인 종6품의 제한을 깨고 승진한 최초의 예가 된다.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의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황수영박사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가 아닌 현대에 들어 와서 서울의 진고개 부근에서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나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추적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확인된 바로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했던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소장가는 큐슈 가고시마 출신의 도진구징(島津久徵)이라는 사람이며, 그의 생애와 활동을 미루어 보아 〈몽유도원도〉는 적어도 1900년 이전에 일본에 건너가 있었다는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 어떤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어 3일만에 완성된 그림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며, 한국회화사 전반에 걸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에는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발문, 그리고, 안평대군의 주위에 있던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당시의 쟁쟁한 인물 21인이 자필로 쓴 찬시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회화 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써, 또는 당시 안평대군을 둘러싼 중신들과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료(史料)로써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왕자로서의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고민, 즉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고, 또 알고 있었던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세계를 찾아 꿈속에서 홀연히 도원의 세계를 여행하였으며, 그가 꿈속에서 경험한 황홀한 이상세계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