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페이, 대만 : 요시다슈이치(吉田修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여행지에서의 독서를 즐거움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고 생각되나, 여행지에서 영화를 본다는 사람과는 그다지 만난 적이 없다, 라고 말들 하는데, 나 자신은 여행지에서 곧잘 영화를 본다.
‘뭣 때문에 일부러 외국에서 영화를 본다는 거지?’
‘언어 모르는데?’
등등, 이 취미를 사람들에게 말하면 반드시 이렇게 비난당한다.
실제로, 애써 시간과 돈을 들여 외국에 간 것이므로, 영화 같은 거 보지 말고 명소(名所)나
구적(旧跡)을 돌아보는 편이 좋을 것이고, 예를 들어 대만에서 프랑스 영화 등을 본 날에는, 프랑스어 회화에 중국어 자막이 붙은 곳에서, 청경채와 두반장을 갖다주고, ‘자아, 프랑스요리를 만드세요’라는 말을 들은 만큼 혼란스럽다.
그래서 외국에서 영화를 고를 때는 혼란을 반감시키기 위해, 되도록 그 나라의 영화를 보기로 하고 있는데, 영어권(의무교육 정도의 지식은 있기에)이라면 몰라도, 그 밖의 나라에서는, 당연히, 누구라도 상상할 수 없는 영화를 멀거니 바라보기도 한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의미도 모르는 영화를 두 시간이나 바라보고 재미가 있을까? 라고 물으면, 정직하게, ‘미묘(微妙)?’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허나, 예를 들어 파리의 때빠진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이 또한 때빠진 영화관 같은 게 있으면 그만 들어가고 만다.
물론 파리의 멋진 영화관이 아니더라도, 로스엔젤리스의 거대 극장도 좋고, 타이페이의 노스탤직한 극장이라도 좋다. 아무튼 여행지에서 영화를 한편 본다는 행위가 무척 사치라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보고 있는 영화의 내용은 종잡을 수 없다고 해도, 그 나라의 분위기를 맛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방콕의 영화관에 불쑥 들어갔을 때인데, 상영 전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다음 회 작품의 예고가 흐른다. 매점에서 산 팝콘을 씹으면서,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타이 영화의 예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편의 영화 예고가 끝나자, 뉴스 영화와 같은 것으로 바뀐다.
‘어어, 아직도 영화관에서 뉴스 같은걸 내보내는군‘ 하면서 느긋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교적 꽉 차있던 장내의 관객들이, 왠지 훌훌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어? 무슨 일?’
한순간, 영화가 끝난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는커녕, 아직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정신 차려보니 관객 전원이 기립을 하고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고향에 들어가면 고향을 따르라. 아무튼 이유는 모르지만, 나도 팝콘을 놓고 서둘러 일어섰다.
다음 순간, 스크린에 비춰진 건 타일랜드 국왕의 초상사진이었다. 국가(國歌)인지, 장엄한 음악이 극장에 흐른다.
국왕의 사진이 몇초 동안 흐른 뒤 사라지자, 관객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착석을 한다. 혼자 멀건이 서있을 수도 없어, 나도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후일(後日) 타이의 친구에게 물었는데, 요컨대 그런 일인 듯싶다. 타일랜드의 국왕이 국민에게 절대적인 인기가 있는 건 알고 있었기에, 이쪽으로서도, 그런 일이라고 말을 하면, 과연 그런 일인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어 말하자면, 부탄에서도 영화를 보았다.
부탄에 갔던 적이 있는 사람 자체가 적다고 생각되기에 부탄의 영화관에서 부탄영화를 본 적이 있는 일본인도 상당히 귀하지 않겠는가.
상영되고 있던 건 훈훈한 패밀리영화로, 모친과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어린 형제 이야기였다. 전반(前半)은 코믹한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어느 날, 동생이 민족의상인 ‘고’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고’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형제는 지혜를 짜서, 오전(午前)에는 형이 자기의 ‘고’를 입고 수업을 받고, 낮이 되면 뛰어 집으로 돌아가서, 오후는 동생이, 이 형의 (헐렁헐렁한) ‘고’를 입고 수업을 받는다.
당연히 언어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부탄의 관객은 아무튼 잘 웃고, 슬픈 정면에서는 잘 운다. 실제로, 언어를 알지 못해도 최후에는 눈두덩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틀림없이 좋은 영화였던 거라고 생각된다.
파리의 영화관에서, 관객끼리의 큰 싸움을 목격한 일도 있다.
이제 제목도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긴박한 장면이 이어지는 서스펜스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 앞쪽의 객석으로부터 뭔가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였기에, 커플이 속삭이고 있는 거려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서서히 커진다.
어차피 영화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생각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참내, 여자가 휴대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그 위 좌석의 남자가 몸을 내밀어 주의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고, 영화를 제쳐놓고 바라보았다. 남자의 거듭되는 주의에도 굴하지 않고, 여자는 휴대전화를 끊지 않는다. 끊기는커녕, 송화구(送話口)를 누르고 등 뒤의 남자에게 뭐라고 말대답을 한다. 그런 가운데, 다른 장소로부터 ‘시끄러! 닥쳐!’ 라는 소리가 튄다.
이제 영화보다 객석인 쪽이 서스펜스 넘친다. 남자가 또 불평을 한다. 여자가 질소냐 하고 되받는다. 다음 순간, 남자가 짜증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가신 듯, 같은 열의 손님을 헤치고, 통로로 나갔다.
‘안보고 돌아가려고?’
과연 남자가 딱하게 생각되었는지, 수분 뒤, 남자도 질소냐 하고 극장의 계원(係員)을 데리고 왔다. 당연히 여자는 별수 없이 계원에게 연행되었다. 이제 영화 볼일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과는 일체 관계없이, 관객석에서 탁탁탁 박수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각국의 영화관에서의 에피소드를 쓰기 시작해보니, 여행한 곳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역시 나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내친 김에, 도 하나만 에피소드를 쓰게 해줬으면 한다.
한해에 몇 번은 방문할 만큼 대만을 좋아하는데, 당연, 대만에서도 가끔 영화를 본다. 재작년의 일인데, 대북(臺北)에서 [해각7호(海角7號)]라는 영화를 봤다. 이건 일본의 대만통치시대에 일어난 일본인 남성과 대만인 여성의 비련(悲戀)과, 현대의 대만인 남성과 일본여성의 사랑을 겹치도록 그린 영화로, 대만에서는 ‘타이타닉’에 이은 흥행수입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영화는 대만어와 북경어와, 가끔 일본어가 사용되고 있다. 영화의 라스트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이 ‘들장미’를 스테이지에서 합창하고, 그 장면에 60년 전 비련(悲戀)의 결말이 포개지는 건데, 그 장면에서 나는 줄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당연히 일본어밖에는 모른다. 그런데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눈물이 흘러 멎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이 [해각칠호(海角七號)가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좀 말투가 이상한데, 그처럼 자신을 울린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고 싶어, 금방 보러 갔다.
아직 정월 기분이 빠지지 않은 시기의 긴자(銀座)의 영화관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마치 답을 맞추듯 자막을 읽었다. 상상하고 있던 대만의 내용에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차오르는 감정는 그다지 차가 없었다. 이국(異國)에서 들은 ‘들장미’도, 긴자(銀座)에서 듣는 ’들장미‘도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스스로도 ‘또 우는 거야’ 하면서 기가 막힐 만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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