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京オリンピック閉會式の際母とあちこち追い掛け回しつつ応援も...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崔浩中(前副總理兼統一院長官)
私は1963年より三年間2等書記官として日本で勤務した。
私が東京で赴任している時、10年以上引き延ばして来た國交正常化の為の韓・日会談が最後の峠を迎えていた。私はたとえ末端とは言え韓・日間の交渉に参与して自分なりに寄與することが出来た。
ついに会談が終り1965年日本総理官邸で韓・日基本條約を始めとする多くの外交文書の署名式が行われる時私は歴史的な現場に参席する栄光と感激を享受する事が出来たのだ。
これと共に忘れられない追憶は1964年に開かれた東京オリンピックである。
この時私はやっと入場券を求めて開会式は女房と共に観覧し、閉会式には母を伴って行った。その時わが選手団はサッカーの予選戰で1ゴールも入れられず0敗のみ繰り返す生き恥をさらし、金メダルは一つも取れずにようやく拳闘で銀メダル一つを取ったばかりだった。でも私は忙しくあちこちの競技場を走り回りつつ熱心に応援した。
その後24年目にわが国のソウルでオリンピックが開けるとはその時想像も出来ない事だった。歴史上最も華麗で盛大なオリンピックを大成功裏に開催して全世界の激讚と羨ましさを独占することが出来た故なによりも誇らしい事だった。
私はその時サウジアラビア大使として勤務していたので東京オリンピックは良く観覧したけれども、肝心なわが国で開かれたオリンピックは観られずやるせなかった。
このオリンピックのおかげでわが国が共産圈にも広く知られて、1988年に私が外務部長官になった時、北方外交に一大凱歌を挙げるのに大きな土台になったのは実にほほえましい事だ。
京鄕新聞 : 1993年6月30日(水曜日)
東京올림필 폐회식때 어머님과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응원도 ...
나는 63년부터 3년간 2등서기관으로 일본에서 근무했다.
내가 東京에 부임하였을 때 10년 이상 끌어온 국료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단이 막바지 고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비록 말단에서나마 韓・日간 교섭에 참여하고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었다.
마침내 회담이 끝나 65년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 기본조약을 비롯한 여러 외교문서 서명식이 거행되었을 때 나는 역사적인 현장에 참석하는 영광과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추억은 64ㄴㄴ 10월에 열린 동경올림픽이다.
이때 나는 어렵게 입장권을 구해서 개회식은 아내와 함께 구경하고, 폐회식에는 어머님을 모시고 갔다. 그 때 우리 선수단은 축구 예선전에서 한골도 못얻고 영패만 거듭하는 수모를 당했고 금메달은 하나도 따지 못한 채 겨우 권투에서 은메당 하나를 따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지런히 이 경기장 저 경기장을 쫓아다니며 열심히 응원했다.
그 후 24년만에 우리나라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리라고는 그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올림픽을 대성공리에 개최해서 온 세계의 부러움과 격찬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때 사우디아라비아대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경올림픽은 잘 구경했으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은 보지 못해 안타까웠다.
이 올림픽 덕분에 우리나라가 공산권에도 널리 알려져 88년에 내가 외무장관이 됐을 때 북방외교에 일대 개가를 올리는데 큰 밑거름이 된 것은 참으로 흐믓한 일이다.
최호중(崔浩中-한국자유총연맹총재)
서가(書架)를 정리하다가 반세기 전 신문에 기재된 오빠 글을 발견했기에 추억에 젖으면서
번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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