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ネクタイ : 넥타이 - 尹五榮(윤오영)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 ネクタイ >
尹五榮
鏡の前でネクタイを結ぼうとするが紐がもつれて思うようにゆかない. もう一度結んでみるがまたもやもつれる. 何度も結び直すがどうしても方法が浮かばない. 日がな日欠かすことなく結んでいたネクタイを今日に限って結ばれないとはなんと情けないこだろう。仕方なく息子を呼んで結んでくれと頼んだ.
若い頃、私が初めて洋服を纏って、ネクタイの結び方を身につけるため鏡の前で練習したことはあるが、ネクタイが結べず慌てふためいたことは初めてだ. 文字を書きながら、ずっと書いていた字を、まともに書いておきながらも変に映ることがあり、いつも通っていた道を、車から降りた途端どちらへ向かえば良いのか面食らう時もあり、隣りの令嬢が衣装を替えただけで、どなたかな、とうろたえるなど、もともと賢い方ではないが、今日はちと酷すぎるようだ。
海觀丈(近代書藝家尹用求の號)が晩年、誰かに文を書いて上げる際、流れるように書き終え、いざ署名になって、「儂の名前何だっけ?」と云って皆を笑わせたそうだが、これは「老來」のことである。自分はさほど老いてはいない。
昔、さる学者が王様の前に呼び出されたが、緊張のあまり歳を下問するや、突然思考力が止まってたじたじしつつ退いたという話もあるが、私は緊張する理由など無いのだ。黃義敦氏のような他人の歳は勿論のこと、生年月日、数十年前の日日まではっきり記憶する方に出会うと、恥ずかしさよりも、あれ本当だろうかなと疑うほどだ。そういえば、私は先天的健忘症がある人かも知れない. どうせ健忘症があるならば、過去のあらゆる苦しさや悲しさ、不愉快な經驗など、きれいさっぱり忘れてしまえば私の健康にもずっと良かっただろうが、忘れて欲しいことはなかなか忘れられないのに, 今日に限ってネクタイの結び方を忘れてしまったのだ。
帽子を手にして庭へ降りると、ふっと一つの話を思い出した。
昔、さる盲人が半生の間明りを見れず生きて来たのが、優れた、いわば神醫に出会い、鍼一本で目が開いた。どれほど世の中が珍しく恍惚か、まったく歡天歡地の思いで飛び上がり、いざ家に帰ろうとしたら方向が分からなく、道を探す術がなかった。さ迷った挙げ句に座り込んで泣き出した。
その時、通りかかりの人が事情を聞いた後、
「元のように目を瞑って行って見ては」。それで再び目を閉じ、杖で探るといっぺんに道が現われた(主客顚倒の表現)。そうだ、私がネクタイの結び方を忘れたのは鏡の前に立ったのがいけなかったのだ。最初から出掛けながら結ぶべきだった。数年間、朝の出勤時間毎に忙しくてあたふたと結ぶのが習慣になり、手が自動的に動いてくれたのだ。反射的に行動したら事は容易いが、意識的に考えれば難しい。蘇東坡を玩んだ青年があったっけ。
蘇東坡は実に見事な髭をしていた。ある日、一人の青年が訪れて、
「先生、その長い髭をお休みになる時は布団の中に入れて眠りますか?」 と聞いた。
「そうだ」と何気なく答えるや、青年は
「それでは相当窮屈でしょうが」
「そうだな。布団の外に出して寝よう」
「それでは肌寒いはずです」
「そうかなあ」と言ったが、彼は夜になってじっくり考えてみた。自分が髭を布団の中に入れて眠ったか出して眠ったかと。入れて眠ると不便で、出して眠ろうとしたら肌寒く、一晩中悩んでちっとも眠れなかったはずだ。
そんなわけで自分も鏡の前で考えれば考えるほど結べなかったかに違いない。
莊子は、「善惡是非は考えれば考えるほど限がない故、聖人はこれを天倪(自然の胸に抱かれた萬物)に和(自然と萬物が一つになる無我地境を意味する)して、忘義無竟に付する(天の端に辿ると意味も忘れるし警戒もわすれる)。」と言った。 (莊子の話を引用した意圖 → 今朝ネクタイを結ぶ際のように、過度に是非を分別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意味で)
しかしながら、全ての生活が反射的習慣だけで動いて来た惰性的な私の生活の一面のようで気苦労を感じる. (この文章の主題意識, 自分の日頃の姿に対する真面目な省察として文を締めくくる.)
< 넥타이 >
윤오영
체경 앞에서 넥타이를 매려니까 가락이 헝클어져서 잘 매지지를 않는다. 다시 매도 또 헝클어진다. 몇 번을 고쳐 매도 영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허구한 날 매던 넥타이를 오늘 따라 맬 줄을 모르다니 딱한 노릇이다. 할 수 없이 아이놈을 불러 좀 매달라고 했다.
내가 젊어서 처음 양복을 사 입고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느라고 체경 앞에서 연습해 본 적도 있지만 넥타이를 못 매서 쩔쩔 매기는 처음이다. 글씨를 쓰다가 밤낮 쓰던 글자, 그나마 제대로 써 놓고도 눈이 서툴 때도 있고 밤낮 다니던 길을 차에서 내려 어느 쪽인지 어리둥절한 때도 있고, 이웃의 영양(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이 옷만 갈아 입어도 누구시냐고 딴전을 하기 일쑤인 내라, 원래 똑똑한 편은 못 되지만 오늘은 좀 심한 것 같다.
해관장(海觀丈, 근대의 서예가 윤용구의 호)은 만년에 남에게 글씨를 써 주다가 거침없이 다 써 읽어 보고는 서명할 때 와서 "내 성명이 뭐더라."해서 사람을 웃겼다지만 이것은 노래(老來, 늙어 가는 무렵)의 일이다. 나야 그렇게 늙지도 않았다.
예전에 어느 학자가 어전(임금의 앞)에 불려 와서 너무 긴장되어 있다가 갑자기 그 나이를 하문하시는 바람에 생각이 막혀 쩔쩔매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긴장될 까닭이 없다. 황의돈 씨처럼 남의 나이는 물론 생일까지 몇십 년 전의 날짜 숫자까지 꼬박꼬박 기억하는 분과 만나면 부끄럽기보다 저게 정말일까 의아할 정도다. 그러면 나는 선천적으로 건망증이 가끔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이왕 건망증이 있을 바에는 과거의 모든 쓰라리고 슬프고 불유쾌한 경험조차 씻은 듯 잊었다면 내 건강에도 한결 다행하련만 안 잊히는 놈은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데, 하필 오늘따라 넥타이 매던 것을 잊어 버렸다.
모자를 들고 뜰에 내려서자, 언뜻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한 장님이 반생을 햇볕을 못 보고 살다가 용하다는 신의(의술이 뛰어나 병을 신통하게 잘 고치는 의원이나 의사)를 만나서 침 한 대에 눈을 떴다. 어떻게 세상이 신기 황홀한지 그야말로 환천환지(歡天歡地, 하늘도 땅도 기뻐할 만큼) 좋아서 날뛰다가 집으로 오려는데 방향을 몰라 길을 찾을 도리가 없다. 헤매다 그냥 주저앉아 울어 버렸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 이 사정을 듣고는,
"눈을 도로 감고 가 보구려." 해서 눈을 다시 감고 지팡이로 더듬으니 쏜살같이 길이 나섰다(주객이 전도된 표현). 그렇다. 내가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 버린 것은 체경 앞에 선 게 탈이다. 진작 들고 나오며 맬 노릇이었다. 몇 해 동안 아침마다 출근 시간이면 총총해서 허둥지둥 매는 것이 습관화되어 손이 자동적으로 매 주었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일이 순하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렵다.
소동파를 골려 먹은 청년이 있지 아니했던가.
소동파는 수염이 장히(기상이나 인품이 훌륭히, 매우 또는 몹시) 좋았다. 하루는 한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 그 긴 수염을 주무실 때는 이불 속에다 놓고 주무십니까?" / 하고 물었다.
"그렇지!" / 하고 무심히 대답하자 청년은
"그러면 퍽 갑갑하시겠습니다."
"응! 이불 밖으로 내 놓고 잘 꺼야."
"그러면 시려우실 겝니다."
"글쎄?" / 하고 나서 그는 그날 밤에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내가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잤던가 내놓고 잤던가 하는 것이다. 넣고 자려면 갑갑하고 내놓고 자려면 시렵고 밤새도록 신고하다(어려운을 일을 당하여 몹시 애쓰다) 한잠도 편히 못 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체경 앞에서 자꾸 생각할수록 옥매졌는지 모른다.
장자는 "시비 선악이 생각하면 할수록 끝이 없으니 성인은 이를 천예(天倪, 자연의 품에 안긴 만물)에 화(和, 자연과 만물이 하나되는 무아지경을 의미함.)하여 망의무경(忘義無竟) 부친다.(하늘 끝에 닿으면 뜻도 잊어 버리고 경계도 잊어버린다.)"고 했다. (장자의 말을 인용한 의도 → 오늘 넥타이를 맬 때처럼 지나치게 시비를 분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
그러나 모든 생활이 반사적 습관으로만 움직여 온 타성적인(오래되어 버릇으로 굳어진) 내 생활의 일면인 것 같아서 고달픔을 느낀다.(이 글의 주제의식, 자신의 평소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글을 마무리함.)
'번역 [飜譯] > 韓日飜譯 [한일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隨筆] 憎い看護婦-朱耀燮 미운 간호부-주요섭 (2) | 2015.12.10 |
---|---|
[poem] 이정하님의 늦가을을 읊은 시 3편 (0) | 2015.12.05 |
가을시 2편 일역해보았습니다 (0) | 2015.11.06 |
[poem] 나호열님의 가을 시 2편 (0) | 2015.10.19 |
[poem] 안도현님의 짧은 시 5편 (0) | 2015.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