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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사람 – 아쿠타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
내 경험에 의하면 요즘 독자들은 대개가 그 소설의 줄거리를 읽는다.
그 다음은 그 소설 안에 그려지는 생활을 동경한다. 이 점은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상당히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생활을 하면서도 부호나 귀족들만 나오는 통속 소설을 애독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가까운 삶을 그린 소설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반대로 독자 자신의 생활과 비슷한 것만 구해서 본다.
난 이런 점들을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세 가지 심정은 동시에
나 자신 안에도 존재하고 있다.
나는 줄거리가 재미있는 소설을 애독한다. 또한 나 자신의 생활과 동떨어진 삶을
그린 소설도 애독하지 않는 건 아니다. 끝으로 나 자신의 생활에 가까운 소설도
물론 애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소설을 감상할 때, 나의 평가를 결정짓는 것은
꼭 그런 기분에서만은 아니다.
만약 내가(독자로서) 이 세상의 애독자들과 다르다면 이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 무엇이 나의 평가를 결정짓는가? 그건 감명의 깊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줄거리의 재미라던가, 나 자신의 생활과 멀다던가, 혹은 나 자신의 생활과
가깝다던가 하는 점도 물론 약간은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 이외에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이 뭔가에 이끌리는 독자의 무리가 곧 독서계급이라 불리는 것이다. 혹은 문예적
지식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계급은 의외로 좁다. 아마도 서양보다 훨씬 좁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러한
사실의 선악을 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사실로서 한마디 할 뿐이다. (1927년)
小説の読者 - 芥川龍之介
僕の経験するところによれば、今の小説の読者といふものは、大抵はその小説の筋を
読んでゐる。その次ぎには、その小説の中に描かれた生活に憧憬を持つてゐる。
これには時々不思議な気持がしないことはない。
現に僕の知つてゐる或る人などは随分経済的に苦しい暮らしをしてゐながら、富豪や
華族ばかり出て来る通俗小説を愛読してゐる。のみならず、この人の生活に近い生活を
書いた小説には全然興味を持つてゐない。
第三には、第二と反対に、その次ぎには読者自身の生活に近いものばかり求めてゐる。
僕はこれらを必ずしも悪いこととは思つてゐない。この三つの心持ちは、同時に僕自身の
中にも存在してゐる。僕は筋の面白い小説を愛読してゐる。それから僕自身の生活に
遠い生活を書いた小説も愛読しないことはない。最後に、僕自身の生活に近い小説を
愛読してゐることは勿論である。
然し、それらの小説を鑑賞する時に、僕の評価を決定するものは必ずしも、それらの
気持ではない。若し僕が(読者として)世間の小説の読者と違つてゐるとするならば、
かう云ふ点にあると思つてゐる。では何が僕の評価を決定するかと云へば感銘の
深さとでも云ふほかはない。それには筋の面白さとか、僕自身の生活に遠いこととか、
或はまた僕自身の生活に近いこととか云ふことも勿論、幾分か影響してゐるだらう。
然しそれらの影響のほかに未だ何かあることを信じてゐる。
この何かに動かされる読者の一群が、つまり読書階級と呼ばれるのである。或は
文芸的知識階級と呼ばれるのである。
かう云ふ階級は存外狭い。おそらくは、西洋よりも一層狭いだらう。僕は今、かう云ふ
事実の善悪を論じてゐるのではない。唯事実として一寸話すだけである。
(昭和二年三月)
*****
문장과 언어와 - 이쿠타가와류노스케
문장
내게 「문장에 너무 집착한다. 그렇게 집착할 것 없다」 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난 별로 필요 이상 문장에 집착한 적은 없다. 문장은 무엇보다 정확하게 쓰고 싶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난 그저 그 점에 유의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펜을 잡았을 때 술술 나가는 적이 거의 없다. 늘 조잡스런 문장을
쓰고 있다.
나의 문장에 대한 고심은 (만약 고심이라고 말 할 수 있다면) 그 점을 정확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타인의 문장에 대한 주문도 나 자신에 대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에는 아무래도 감탄할 수 없다. 적어도 좋아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나는 문장 상의 아폴로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방해석(方解石, Calcite)처럼 확실한, 애매함을 용서치 않는
문장을 쓰고 싶다.
언어
50년 전의 일본인은 [신]이라는 언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 머리를 각발(角髮)로 빗고,
목둘레에 곡옥(勾玉)을 감은 남녀의 모습을 느꼈다. 그런데 요즘 일본인은 – 적어도
오늘날의 젊은이는 대개가 턱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서양인을 느끼는 모양이다.
언어는 같은 [신(神)]이다. 그러나 마음에 떠오르는 모습은 이토록 변천하고 있다.
또 보고 싶어 꽃으로 밝아 오는 신의 얼굴 (なお見たし花に明け行く神の顔 - 葛城山)
나는 전에 고미야(小宮)씨와 이 파초(芭蕉)의 구(句)를 놓고 토론한 적이 있다.
시키(子規) 거사의 생각을 빌리자면、이 구는 해학으로 장난 친 것이다. 나도 그 설에
이의는 없다. 하지만 고미야씨는 막무가내로 장엄한 구라고 주장했다.
화력(画力)은 500년, 서력(書力)은 800년에 다한다고 한다. 문장의 힘이 다하는 건
몇백년쯤 걸릴 것인가?
文章と言葉と - 芥川龍之介
文章
僕に「文章に凝りすぎる。さう凝るな」といふ友だちがある。僕は別段必要以上に文章に
凝つた覚えはない。文章は何よりもはつきり書きたい。頭の中にあるものをはつきり
文章に現したい。僕は只それだけを心がけてゐる。それだけでもペンを持つて見ると、
滅多にすらすら行つたことはない。必ずごたごたした文章を書いてゐる。僕の文章上の
苦心といふのは(もし苦心といひ得るとすれば)そこをはつきりさせるだけである。
他人の文章に対する注文も僕自身に対するのと同じことである。はつきりしない文章には
どうしても感心することは出来ない。少くとも好きになることは出来ない。つまり
僕は文章上のアポロ主義を奉ずるものである。
僕は誰に何といはれても、方解石のやうにはつきりした、曖昧を許さぬ文章を書きたい。
言葉
五十年前の日本人は「神」といふ言葉を聞いた時、大抵髪をみづらに結ひ、
首のまはりに勾玉をかけた男女の姿を感じたものである。しかし今日の日本人は
――少くとも今日の青年は大抵長ながと顋髯をのばした西洋人を感じてゐるらしい。
言葉は同じ「神」である。が、心に浮かぶ姿はこの位すでに変遷してゐる。
なほ見たし花に明け行く神の顔(葛城山)
僕はいつか小宮さんとかういふ芭蕉の句を論じあつた。子規居士の考へる所によれば、
この句は諧謔を弄したものである。僕もその説に異存はない。しかし小宮さんは
どうしても荘厳な句だと主張してゐた。画力は五百年、書力は八百年に尽きるさうである。
文章の力の尽きるのは何百年位かかるものであら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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