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第33號 :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 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第33號 :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所在地: 慶南昌寧郡昌寧邑
時代: 新羅眞興王
ビッボル伽倻(現在の昌寧)を新羅領土へ編入した眞興王が, 此の土地を巡狩した
記念として建てた碑. 当時のビッボル伽倻は、新羅が西側へ進出するにいたり
非常に重要な要所で, 眞興王16年(555)新羅に倂合された。その後下州と名を変え
565年、デヤジュ(今の陜川)と共に比斯伐郡又は比自化郡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元は牧馬山城の麓にあった碑を、1924年今の場所に移し、碑閣の中に安置した。
自然石の前面を平らに磨いて碑文を彫刻し, 回りに線で縁取らせている.
他の巡狩碑と異なり ‘巡狩管境’と言う題目がないので拓境碑と呼ばれるが、
王を隨行した臣下の名單が記錄されているのに鑑み巡狩碑に屬するといえよう.
碑文は摩滅し過ぎて判讀が難しい狀態だが, 後の部分ははっきり読めるぐらい鮮明だ.
他の巡狩碑內容を參考にすると、大体、眞興王がビッボル伽倻を占領し、領土を
擴張した事實と、王の統治理念, 抱負などが記されていたと察せられる。後半部に
隨行臣下の名が職官, 職位, 所屬の順に羅列されており、当時の地方行政組織,
身分制及び社會組織の把握に大いに役立つ.
碑を建てた時期は大伽倻が滅亡する1年前の眞興王22年(561)で, この地域を伽倻進出の
足場にしようとした王の政治的意圖が窺われる. なお、眞興王當時の史實記録を以て
『三國史記』の記事が補われ, この時代の歷史的事實を証し理解することに寄與している.
국보 33호 : 신라진흥왕 척경비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신라 진흥왕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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