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第24號: 石窟庵石窟 석굴암 석굴   -   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第24號:  石窟庵石窟
所在地:   慶北慶州市進峴洞891 佛國寺
時代:   統一新羅時代

石窟庵は新羅景德王10年(751)、當時の宰相であった金大成が創建を始め、惠恭王10年(774)に完成されたが, 建立當時は石佛寺と呼ばれた. 景德王は新羅中期の王で、この王が在位する間(742∼765)、新羅佛敎藝術の全盛期を築きあげたわけだが, 石窟庵以外にも、佛國寺, 多寶塔, 釋迦塔, 黃龍寺拯数多くの文化財がこの時期に建築されている.

土含山の中腹に白色の花崗巖を利用して人爲的に石窟を作り, 內部空間に、本尊佛の釋迦如來佛像を中心として、回りの壁面に菩薩及び諸子像や力師像, 天王像等 、總40具の佛像が彫刻されたが、今は38具だけが残っている.

石窟庵石窟の構造は、入口である直四角形の前室と圓形の主室が、廊下役のせまい通路に連結されており, 360餘個の平らな石で圓形主室の天井を巧妙に構築した建築技法は、世界に類例のない優れた技術である.

前室には、左右に各4軀の八部神將像があり, 通路の左右入口には金剛力士像を彫刻, せまい通路には左右に2軀づつ東西南北四方を守護する四天王像が彫刻されている. 圓形の主室入口には左右に8角の石柱を立て, その中に本尊佛が中心からやや下がって安置されている. 壁面には入口から天部立像2軀, 菩薩立像2軀, 羅漢立像10軀が配列され, 本尊佛後側の丸い壁には石窟の中で最も精巧に彫刻された十一面觀世音菩薩立像が立っている.
尚、窟の天井の回りには10個の龕室があり、その中に坐像の菩薩と居士などが置かれている.

石窟庵石窟は新羅佛敎藝術の全盛期に成された最高傑作で、建築, 數理, 幾何學, 宗敎, 藝術 等が有機的に結合されていることで一層引き立って見える. この石窟庵は1995年12月、佛國寺と共にユネスコ世界文化遺産として共同登錄された. <文化財廳>

국보 24호:  석굴암 석굴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불국사
시대: 통일신라시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