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鄕新聞 2017年11月23日 - 자율학습 [自己流學習]
[社說] 板門店越えた脫北軍人の映像が見せてくれた分断の現実
UN司令部が22日公開した板門店共同警備区域北朝鮮軍人歸順事件当時の映像は南北が武力対置している分斷現実を再び呼び起こされた. UN司が公開した閉鎖回路(CC)TVを見ると、去る13日の午後歸順兵士が乗ったジープ車輛が北朝鮮区域道路を疾走して「72時間橋」と「金日成親筆碑」を通り軍事分界線の方へ向かって留まる. 車輪が排水路に掛かったのかそれ以上動かないや兵士はジープから下りた後、間近まで追擊して来た北朝鮮軍を避けて南の方へ走り, 北朝鮮軍四名が彼に向けて照準射擊をやった. この中の一人が兵士を追擊するために軍事分界線を数歩越えたが、当惑した素振りで引き返しもした. UN司は、韓国軍警備大隊の幹部三名が、負傷を受けて警備区域建物の壁下に倒れている兵士へ抱腹で近寄り救出する場面が入った監視裝備映像も公開した.
今度の事件に関する韓国軍の対応をもって自由韓国党は「北朝鮮軍が軍事分界線を越えて来てもわが軍は何の対応も出来なかった」と言いつつ、「対国民に謝るとともに責任者に対する問責と再發防止対策を整えるべきだ」と批判した. 其の代りにどうやったら良かったのか聞き返したい. 対応射撃で板門店を血で染めろとの話か. UN軍がこの日歸順者調査結果の発表を通して、「韓国軍警備大隊が嚴格なる判斷を通して賢く対応した」と結論を出した点を重視する必要がある. 北朝鮮軍の停戰協定違反に対しては別途で嚴重に責任を問う事で足りるだろう.
共同警備區域を通った歸順事例は数度あったけれども今度のように映像でその全貌が生々しく公開された事は初めてだ. 鮮明では無いCCTV画面でも関わらず戦争映画さながらの緊迫感を感じさせる. 普段ニュース画面に現れる板門店は南北兵士等が硬い表情の不動姿勢で警戒を成すとか、たまに相手軍の動向をカメラで撮る「停中動」の風景だった. 観光客とか外国要人等の訪問が許容される程度の「緊張中の平穩」が維持されて来た空間でもあった.
しかしこの日公開された影像は、このような平穩が何時でも瞬く間に毀れる事がある停戰狀態の中で我等が生きている事を確認させた. 辛うじて死境を越えたものの、全身に銃傷を浴びて苦痛の中で治療を受けている北朝鮮兵士の立場は分断の悲劇性を応弁する. 北朝鮮軍が軍事分界線を越える銃擊に加えて暫し軍事分界線を越える事で見た如く停戰協定も狀況に依っては無用之物になることを證明した. 停戰体制を終えて韓半島に平和体制を構築せねばならぬ, 容易くないけれども達城すべき課題が我等の前に置かれている事を悟らせる.
[사설] 판문점 넘는 탈북군인의 영상이 보여준 분단의 현실
유엔사령부가 22일 공개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한군인 귀순 사건 당시의 영상은 남북이 무력대치하고 있는 분단현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유엔사가 공개한 폐쇄회로(CC)TV를 보면 지난 13일 오후 귀순 병사가 탄 지프차량이 북한구역 도로를 질주해 ‘72시간 다리’와 ‘김일성 친필비’를 거쳐 군사분계선 쪽으로 향하다 멈춰선다. 차량 바퀴가 배수로에 걸린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자 병사는 지프에서 내린 뒤 지척까지 추격해온 북한군인을 피해 남쪽으로 내달렸고, 북한군인 4명이 그를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이 중 한 명은 병사를 추격하느라 군사분계선을 몇 걸음 넘어섰다가 당황한 몸짓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유엔사는 한국군 경비대대 간부 3명이 부상을 입고 경비구역 건물 벽 아래 쓰러져 있는 병사에게 포복으로 다가가 구출하는 장면이 담긴 열상감시장비 영상도 공개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군의 대응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도 우리 군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면서 “대국민 사과와 함께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대신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되묻고 싶다. 맞대응 사격으로 판문점을 피로 물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유엔군이 이날 귀순자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한국군 경비대대 자원들이 엄격한 판단을 통해 현명하게 대응했다”고 결론 내린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군의 정전협정 위반에 대해서는 별도로 엄중하게 책임을 물으면 될 일이다.
공동경비구역을 통한 귀순사례는 그간 몇 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영상으로 그 전모가 생생하게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선명하지 않은 CCTV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박감을 느끼게 한다. 평소 뉴스 화면에 비치는 판문점은 남북한 병사들이 굳은 표정의 부동자세로 경계를 펴거나 간혹 상대방의 동향을 카메라로 찍는 ‘정중동’의 풍경이었다. 관광객이나 외국인사들의 방문이 허용될 정도로 ‘긴장 속 평온’이 유지되어온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영상은 이런 평온함이 언제든 순식간에 깨질 수 있는 정전상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간신히 사경을 넘긴 했지만 온몸에 총상을 입고 고통 속에 치료를 받고 있는 북한병사의 처지는 분단의 비극성을 웅변한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너머로 총격을 가했고 잠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에서 보듯 정전협정도 상황에 따라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정전체제를 끝내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쉽지 않지만 달성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일깨운다.
京鄕新聞 2017年 11月 23日
[餘滴] 必死の脫出 : 李キフアン論說委員
1962年8月17日、東独の18才靑年ペトル・ぺヒタ─がベルリン障壁を越える脫出を試圖した. ぺヒタ─は障壁隣近の木工所建物の中に隠れていて、窓を通して「死亡の帯(Death Strip · 東独が造って置いた無人地帶)」へ飛び降りた. ぺヒタ─が「死亡の帯」区域を横切り鐵條網が設置された2メートルの壁を飛び越える刹那だった. 遅れて気付いた東ドイツ警備兵等が見境無く銃を撃ち捲った. ぺヒタ─はついに終りの循環銃に尻を射たれてしまった. 西ベルリン市民等はこの脫出場面を目擊していた.
ぺヒタ─は東独の「死亡の帯」区域へ落ち、「助けてくれえ」と悲鳴で叫んだ. しかし東独警備兵はびくともしなかった. 西独警察が血を流しつつ泣き叫ぶぺヒタ─に包帯を投げた. しかしながら距離が遠すぎた. 1時間餘の間なんらの救護措置も受けず、血を流すしかなかった. じだんだを踏み続けていた西独市民等は示威隊を形成しながら東独警備兵に向かって泣き叫んだ。「この殺人魔等よ!」。後日、東独の警備隊長は「(ぺヒタ─の脫出)三日前に東独兵士が西独聯邦警察の銃擊を受けた事が有った故」と弁明した. 障壁を守っていた美軍もおろそかに対応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 武力衝突の危險故だ. 結局少年から抜けだせなかった18才煉瓦工靑年は市民等が見守る前で悲鳴を挙げながら徐々に死んでしまった. 1962年、時事週刊誌タイムはぺヒタ─の死亡を契機にベルリン障壁を「恥辱の壁」と表現した.
去る22日公開された北朝鮮軍兵士の脫出映像は55年前ベルリン障壁で銃擊を受け倒れてしまったぺヒタ─の写真を聯想させる. 死ぬ覚悟で走る脫北兵士に向けてすぐ後ろで數十発の銃擊を加え、軍事分界線を少し侵犯してびっくり仰天逃亡する北朝鮮軍の姿…. そしてその刹那の場面を映像で見守るしかない市民等の無力感…. どうしてあれほど55年前のベルリン障壁事件と似通ったのか解らない. しかし血を流しなつつ倒れたぺヒタ─の写真一枚は、数十年の間ベルリンが招いた衝擊を象徵する强烈なイメージとして残っている. 北朝鮮軍兵士の脫出映像も同じであろう. 南北分断の冷嚴な現実と, 何よりも北朝鮮政権の脆弱なる人権狀況を証拠する象徵として末長く残るだろう.
경향신문 2017년 11월 23일
[여적] 필사의 탈출 : 이기환 논설위원
1962년 8월17일 동독의 18살 청년 페터 페히터가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페히터는 장벽 인근의 목공소 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창문을 통해 ‘죽음의 띠(Death Strip·동독이 만들어놓은 무인지대)’로 뛰어내렸다. 페히터가 ‘죽음의 띠’ 구역을 가로질러 철조망이 설치된 2m 벽을 넘어설 찰나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동독 경비병들이 마구 총을 쏘아댔다. 페히터는 그만 마지막 순간 엉덩이에 총을 맞고 말았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이 탈출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페히터는 동독의 ‘죽음의 띠’ 구역으로 떨어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동독 경비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독 경찰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페히터에게 붕대를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1시간여 동안 아무런 구호조치를 받지 못한 채 피를 흘려야 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서독시민들은 시위대를 형성하며 동독 경비병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 살인마들아!” 훗날 동독의 경비대장은 “(페히터의 탈출) 사흘 전 동독 병사가 서독연방경찰의 총격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장벽을 지키던 미군도 섣불리 대응할 수 없었다. 무력충돌의 위험 때문이었다. 결국 소년티를 벗지 못한 18살 벽돌공 청년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죽어갔다. 1962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페히터의 죽음을 계기로 베를린 장벽을 ‘치욕의 벽’으로 표현했다.
지난 22일 공개된 북한군 병사의 탈출 영상은 55년 전 베를린 장벽에서 총격을 받아 쓰러진 페히터의 사진을 연상시킨다. 죽을 각오로 뛰는 탈북병사를 향해 바로 뒤에서 수십발의 총격을 가하고 군사분계선을 살짝 침범하고는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북한군의 모습…. 그리고 그 찰나의 장면을 영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무력감…. 어쩌면 그렇게 55년 전 베를린 장벽사건과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피를 흘리며 쓰러진 페히터의 사진 한 장은 수십년 동안 베를린 장벽이 초래한 충격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북한군 병사의 탈출 영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북분단의 냉엄한 현실과, 무엇보다 북한 정권의 취약한 인권 상황을 증거하는 상징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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