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생활의 정-윤오영: 生活の情-尹五榮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生活の情 - 尹五榮
人間は幸せで生きるのではなく, 幸せを追求することで生きる. 追求することが無い人は凄く不幸な人間だ. なお、不幸から抜け出すために生きる. 人間はそのためみんな一緒に生きて来た.
傍で人が死ぬのを見つつ、人生とは実に他愛ないと思いながらも、自分だけはずっと長生きすると信じる. あやふやな自分の前途だけを信じながら生きる. 七十が過ぎ、寿命が底をついたのを知りつつも決して明日か明後日死ぬとは考えない. 病席に横たえて、「今度こそ自分は起き上がれないだろう。だから遺言を残す」と言いながらも十分や二十分後とは思わない. 最後の峠になってもほとんどは一分一秒まで抵抗しつつ頑張ってみる. もしや人間が完璧な幸福の位置に置かれていたとすれば、これは何も追求するものが無い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ことになる. それは即ち死滅である. だが途方もない困境に落ちた場合は、その困境から逃れることだけでもどれほど大きな幸せを感じることか. だからこそ幸福とは即ち一言で生の意志より来る物と言える.
喜びとは受けた時の感情であり, 悲しみとは失った時の感情である。大きくとも小さくとも、時時刻刻に受けたり失ったりしつつ、嬉しさや悲しみで模様を編みつつ生きるのが人生である. 人生の底には我等の力では届かぬ、我等の知慧では測り知れぬ深淵の海が流れている. この深淵の海底に辿る時,初めて無常と大悲を感じる. 言い換えれば人生とは悲しみの海上に浮んで流れる一匹の魚だ. その魚は海の中で自由自在に泳ぎ、悠悠とヒレを濡らしながら遊ぶこともできるのだ. 莊子の「逍遙遊」からもかようなうれしさを感じることが出来る. 私の浅はかな感傷が莊子の深奧なる心境を窺うには途方もなく皮相的かも知れない. だが東洋的達観から来るうれしさの中にはこのような感じが多分に溶解しているのが窺える. しかしながら我等はこれほど豊かにはなれない. 現実はもう少し辛くてぴりっとしている. 苦しさとは決して無味ではなく, 安易なことでもない. 実在とは拒否したとて無くなるものでもなく, 逃避したとて消えるものでもない. また辛さや悲しみは消え嬉しさや楽しさのみ残るものでもないし, 甘くて油っこいものだけが美味しいとも限らない. 旋花は甘いから掘って食べるし, 木賊は苦味に魅せて掘って食べる. 甘さや苦さが共に味と同じく、悲しみと楽しみが共に情である. 情からはなれた生活など他にあるものではない.
「文は人生の文彩」と述べた人がいる. 私はこの言葉を悲しみや喜び、いわば涙と笑いで染み付いた模様という意味で受け入れる。そして悲しみや喜びをそのまま感じつつ、そのまま呑み込み、そのまま噛みつつ生きて行きたい. 言い直せば苦味や甘味を遠慮せずそのまま味わいつつ、濃い涙の中で生活を追求したいのだ. それを話しながら互いに笑ったり泣いたりしてくれる人があればそれより大きな嬉しさは無いだろう. 私は独りで山道を歩きながら、奇異な石の間を流れる清らかな泉を見てふと左右を見回す. この素晴らしさを独りで見るのが寂しいのだ. 険しい坂道で何度も倒れつつ危機一髮の冒險をやっとくりぬけ、千辛萬苦の後頂上に立ち、勝利の快感を味わう時、ふっと後ろを振り返る. 辛苦の經驗と、この征服の快感を誰かに話してやりたいのだ。 尚、数多くの峽谷を通ってほぼ山窮水盡處へ到着し、言いきれない感激と濃い侘しさに落ちつつ身を持ち堪えれずにいる時、頭上の絶壁上に古人の刻字痕迹が目につき, 狂うほど懐かしくて縺れた蔦を掻き分け刻字を読んでみる. 主の名も伝われていないその詩句が、自分が受けた直感とほぼ一致するのを発見した時、知らずに涙を拭く. うれしいのだ. 古人の文を読みながら他人の文に酔い痴れるという事とはこんなことではなかろうか. 偉大なる哲理だからではなく, 高尙な說教だからでもない。必ずしも実利や実益のためだけではあるまい. 平凡なら平凡であるほど、愚拙なら愚拙であるほど生活に逼眞するのだ. よく隨筆を文章の中でも甲斐の無い雜錄の一つと言われるが、元はと云えば最も薄い文章でありながらも生活の上では最も濃い姿勢である。
すべての人間が偉人にはなれないはずだ. すべての生活が幸運に浸れるはずもない. でも虚勢を捨てれば純情が残る. 人生行路には悲しみと喜びがある. 純情は悲しみにすなおで喜びにすなおだ. 故に涙と笑いがある. 涙と笑いが彩られた模様, これが人生の文彩である. 人生の足跡であり、歴史の餘痕と云っても良い.
幸福とはたいしたものじゃない. 生活の中で生活を追究する生の意味であると共に、濃い生活から來る味であり情である.
私は悲しいから悲しみ、悲しいから泣いた. 私は嬉しいので喜び、嬉しいので笑った. これが尋常だ. ここには造作が無く修飾が無く、何かの意圖から來る不純が無く、自分を傲慢にのしあげる必要もなく、自分を卑屈に屈む必要もない. 憎惡や愛好を飛び越えた情, ここに新たな人生の味を感ずる. そして新たな探索や追究の糸口をつかむ. これは一つの吟味であり, 摸索であり、また生活の創造でもある. 真実な生活とはこんなことではなかろうか. 淳朴の情緖とはこれでなかろうか. 陋屋でも恥じらうことの無い良心的生活とはまたこれではなかろうか. かりにそうではないとしても、これが罪無き心情であり, 涙ぐましい人間のささやかな幸せであり, 香りであることだけは否認したくない.
생활의 정 - 윤오영
사람은 행복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맛에 산다. 추구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극히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또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다. 사람은 그래서 다 같이 살아 왔다.
옆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하구나 하면서도 자기만은 아직도 오래 살 것 같이 믿는다. 못 믿을 자기 앞만을 믿고 산다. 칠십이 넘어 수명의 바닥이 보인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결코 내일이나 모레 죽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석에 누워서 “이번에는 내가 필시 못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하면서도 아직도 십분 이십분 뒤라고는 믿지 않는다. 마지막 고비에서도 대개는 일분일초까지라도 저항하며 뻣대본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행복한 위치에 놓여 있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더 추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사멸(死滅)이다. 또 기막힌 곤경에 처해있을 때는 이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을 느낄 것인가. 그러므로 행복이란 결국 한 마디로 해서 생(生)의 의지에서 오는 것이다.
기쁨이란 얻었을 때의 감정이요, 슬픔이란 잃었을 때의 감정이다. 크든 작든 시시각각으로 얻고 잃고 기쁨과 슬픔으로 무늬를 짜가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의 바닥에는 우리의 힘으로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지혜로 헤아리지 못하는 심연(深淵)의 바다가 흐르고 있다. 이 심연의 해저(海底)에 부딪칠 때 비로소 무상(無常)과 대비(大悲)를 느낀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슬픔의 바다 위에 떠가는 한 마리의 고기다. 그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도 치고 유유(悠悠)히 꼬리를 젖고 노닐 수도 있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나의 천박한 감상이 장자의 심오(深奧)한 심경(心境)을 엿보기에는 너무나 피상적(皮相的)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양적인 달관(達觀)에서 오는 즐거움 속에는 이런 기미(氣味)가 다분히 용해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너그러울 수만은 없다. 현실은 좀 더 쓰라리고 짜릿하다. 괴로움이란 결코 무미(無味)한 것도 아니요, 안이(安易)한 것도 아니다. 실재란 거부함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도피함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 괴로움과 슬픔을 떠나 기쁘고 즐거움만이 남는 것도 아니요, 달고 기름진 것만이 맛일 수도 없다. 메는 단맛에 캐 먹고, 쏙새는 쓴맛에 캐 먹는다. 달고 쓴 것이 다 맛인 거와 같이 슬프고 기쁜 것이 다 정(情)이다. 정을 떠나서 생활이란 따로 있지 않다.
“글은 인생의 문채”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슬픔과 기쁨 즉 눈물과 웃음의 얼룩진 무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느끼며 삼킬대로 삼키고, 씹을대로 씹어가며 살아가고 싶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쓴맛 단맛을 사양 않고 있는대로 알뜰히 맛보며 짙은 눈물 속에서 생활을 추구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며 서로 웃고 울어 주는 이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즐거움은 없다. 나는 홀로 산길을 걷다가 기이(奇異)한 돌틈에서 흐르는 맑은 샘을 보고 문득 좌우를 돌아다본다. 이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가 외로워서다. 험한 비탈에서 몇 번을 넘어지고 위기일발(危機一髮)의 모험을 겨우 벗어나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은 뒤에 정상에 서서 승리의 쾌감을 맛볼 때 문득 뒤를 돌아본다. 신고(辛苦)의 쓴 경험과 이 정복의 쾌감을 누구에겐지 말해주고 싶어서다. 다시 협곡(峽谷)을 무수히 지나 거의 산궁수진처(山窮水盡處)에 다달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짙은 외로움에 잠겨 지탱을 못할 때, 바로 머리 위 절벽상(絶壁上)에 고인(古人)의 각자(刻字)의 흔적을 보고, 미칠 듯 반가와서 엉긴 덩굴을 헤치고 각자를 읽어본다. 주인의 성명도 전하지 않는 그 시구(詩句)가 내가 얻은 직감과 거의 일치함을 발견할 때, 문득 눈물을 씻는다. 반가워서다. 옛 사람의 글을 읽고, 남의 글에 취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위대한 철리(哲理)만이 아니요, 고상한 설교(說教)만이 아니요, 반드시 실리(實利) 실익(實益)을 위해서 만이 아니다.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우졸(愚拙)하면 우졸할수록 생활에 핍진해 오는 것이다. 흔히 수필을 문장 중에서도 보람 없는 잡록(雜錄)의 하나로 여기거니와 따지고 보면 글 중에서는 가장 엷은 문장이면서 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짙은 자세(姿勢)다.
사람마다 다 위인이 될 수도 없다. 생활마다 다 행운에 젖을 수도 없다. 그러나 허위를 버리면 순정이 있다. 인생행로(人生行路)에는 슬픔과 기쁨이 있다. 순정은 슬픔에 솔직하고 기쁨에 솔직하다. 따라서 눈물과 웃음이 있다. 눈물과 웃음의 아롱진 무늬, 이것이 인생의 문채다. 인생의 발자취요 역사의 여흔(餘痕)이라고 해도 좋다.
행복이란 별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생활을 추구하는 생의 의미인 동시에 짙은 생활에서 오는 맛이요 정이다.
나는 슬프기에 슬퍼했고 슬펐기에 울었다. 나는 기쁘기에 기뻐했고 기쁘기에 웃었다. 이것이 진솔이다. 여기에는 조작이 없고 수식이 없고 어떠한 의도에서 오는 불순이 없고 자기를 거만하게 높일 필요도 없고 자기를 비굴하게 낮출 필요도 없다. 증오와 애호를 뛰어 넘은 정, 여기에 새로운 인생의 맛을 느낀다. 그리고 새로운 탐색과 추구의 실마리를 잡는다. 이것은 하나의 음미(吟味)요, 모색(摸索)이요 또 생활의 창조이기도 하다. 진실한 생활이란 이것이 아닐까. 순박한 정서란 이것이 아닐까. 옥우(屋隅)에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적 생활이란 또 이것이 아닐까. 비록 그렇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죄 없는 심정이요, 눈물겨운 인간의 조그마한 행복이요, 향기인 것만은 부인(否認)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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