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落ち葉を炊きながら - 李孝石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落ち葉を炊きながら 
                                                           李孝石
秋が深まると私はほぼ毎日庭の落ち葉を掃き集めねばならない. 毎日やっているが,
落ち葉はいつの間にか舞い落ち再び積み重なっている. 落ち葉はやはりこの世の人間数より
多いようだ. 三十坪足らずの庭だが、毎日の手入れがままならない. 桜の樹, りんごの樹....
いちばん面倒なものは蔦である. 蔦は、夏の一時期壁を隈無く這おい, 屋根や煙突の
赤い色だけを残して家をすっかり緑の世界に変えて呉れる時のみうつくしく、
すべての葉を落とした、みすぼらしく枯れた幹を網のように廻している頃になると 
もう目を向ける値打ちもない。ただただ煩わしいだけがその落ち葉である. 例えば
桜のようにあざやかに色付くのでもなく、最初からくすんだ色に染まり、味気ない
大きな葉っぱが路地の上に落ち、雨に打たれでもすればむさくるしく土の中に埋まるため,
どうしても舞い落ちる度にその後片付けを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

桜木の下に掻き集めた山ほどの落ち葉に火をつけると, ぱちぱちと中から燃えはじめ,
細くたち上がるけむりは、風が無い日など低く広がりやがて庭全体を深く覆う.
落ち葉の燃える匂いより良いのがまたあるだろうか。煎ったばかりのコーヒーの香りがする.
良く熟れたハシバミの匂いがする. 熊手を手に、いつまでもじっと煙の中に立っている,
燃えて散らかる落ち葉の小山を眺めながら芳ばしい匂いを嗅いでいると,突然生きる意慾を
猛烈に感じる. 煙はいつの間に体へ染み込み着物や手の甲まで匂う。

私はその匂いを限りなく愛しながら生きる楽しさに浸り, 改めて生という題目を
貴重なものとして頭のなかに仕舞う. 陰影と潤澤と色彩が貧困になり, すっかり緑が
姿を隠した, 夢をなくした空虚な庭の真ん中に立ち, 夢の殻である落ち葉を炊きながら
ひたすら生の常念に浸るのである. 貧弱な裸の庭は、もう夢見るにはふさわしくない
からだろうか。
華やかな緑の記憶は実に限りなく遠いところへ消えてしまったが、まだ追憶や感傷に
沈んではならない.

秋! 秋は生の季節だ. 私はいつも花壇の後ろの方に深く穴を掘り, 燃え尽くした
落ち葉の灰を---死んでしまった夢の屍體を---土の中に埋め, 厳かで厳しい生の姿勢に
戻らねばならない. 物語の中の少年のように逞しくならねばならない.

珍しくも自ら風呂水を汲み火を起すことも勿論このような感覚からである.
ホースで風呂桶に水を入れるのも楽しければ, 涙を流しつつ苦労しながら小さな竈に
木をくべるのも楽しい. 薄暗い台所にうずくまり, 真っ赤に燃え上がる炎を
小児的感動を以て眺める. 暗闇を背景に真っ赤に燃える火は, なんか神聖で神靈な
もののように感ずる.

顔を火照らし緊張した姿でうずくまっている私の様子は、まるで貴重な土産を
プロメテウスから受け取る際の, 太古の原始的それと似ているかも知れない.

私は改めて心の中から火の德を讚美しつつ、神話の中の英雄に感謝の念を捧げる.
やがて風呂に湯気が立ち昇る. 深い靄の海の真ん中に沈む如く、童話感覚で
心を飾りながら風呂桶に全身を深く浸かると, まさに天國に居るような気になる.
地上天國とは他でもない, いつでも入れる家の中の風呂場がそれだ. 人間は水から生れ
あげくには水の中で天国を追求するのではなかろうか。

水と火---この二つを以て生は要約できる. 季節的意慾が最も強烈に現われるのは
この二つから成ると思う. どの季節も同じであろうが, 秋の季節が最も生活的である故は
なによりもこの二元素のすばらしい印象の上に成り立つからだろう.
煖爐は赤く燃えねばならず, 火鉢の炭火はかっかと炎をあげねばならず, やかんの湯は
ぐらぐらたぎねばならない.

百貨店の地下でコーヒー豆を挽いて貰い、そのまま鞄のなかに入れ, 電車のなかで
濃い香りを嗅ぎながら家に急ぐ. そんな自分の姿を子供っぽいと思いつつ, また
その思いを楽しみつつ、これが生だと感じるのである.
ひんやりした広い部屋でお茶を飲みながら、そこまで考えることが生の思いである.
これ以上役に立ちそうもないベッドに、熱い湯たんぽでもいくつか入れてみようか考え、
部屋の隅には今年の冬もまたクリスマストリーを置き、豆電球で飾ることを工夫し,
雪が降ったらスキーを始めてみようかと計画を立ててみる. このような他愛もないことを
考える時だけ悩みも心配事も何処かへ吹っ飛んでしまう.
本と取っ組み, 原稿用紙の前でむずかっている同じ書齋で, すっきりした心でこのような
考えに耽ることはまことに愉快なことである.

テーブルの前にかじりついたま、これといった仕事もないのに、じっとしておらず, 
考え, 悩みつつ, 生きるための仕事には寸陰を惜しみながら、たとえば庭の手入れなど
消費的だ, 非生産的だとあざ笑ったものが、かえってそのような些細な生活事が創造的,
生産的意味だということを發見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一体どうしたことだろう。

季節の所為だろうか。 深まる秋, この裸の庭が一層生き甲斐を感じさせた所為だろうか。

李孝石: 小說家, 代表作-'そば花の咲く頃(短篇)'
1907年 ~ 1942年
江原道平昌に記念館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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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 낙엽을 태우며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 새 날아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 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ㅎ지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 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 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 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없는 그 넓은 잎은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 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리 속에 띄운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한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졀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에늘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죽어버린 꿈의 시체를---땅 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 오르는 불꽃을 어린 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골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 태곳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의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늘 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한느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거시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을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 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 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멸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