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寶59號: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 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59號: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所在地 : 江原道原州市부론면 법천리 74-2
時代 : 高麗時代
江原道江原道原州市の法泉寺趾にある高麗時代の塔碑. 1085年(宣宗2)に建立.
高さ455㎝, 碑身の高さ295㎝, 幅141㎝.
高麗時代の石碑の代表に値する傑作で、彫刻手法が優れている.
碑身の横面に刻まれた雲龍彫刻と、龜趺の龜甲紋の中に彫られた ‘王’字など特異で
碑面の縁に彫刻されている寶相唐草紋や、螭首の四つ角につけた耳花及び螭首中央の
相輪部がたいへん華麗である.
龜跌は広い地臺石の上に置かれ、下には雲模様が裝飾されている.
龍頭化された亀頭の首は長くのびて正面を向いており、首には魚鱗を表している.
背には四四角い區劃の中へ別個の龜甲紋を刻み、そのなかに ‘瓦’字が陽刻されている.
背の中央には簡潔な覆蓮の碑座を設け碑身を立てた. 碑身の外側の回りに寶相唐草紋を
回し彫刻したのが特徵であり、側面に雙龍を彫刻したのも特異である.
耳首は防止を被ったような形で、四耳の轉角がくっきりしており耳花がある. 耳首中央に
相輪部を置き寶珠を載せた.
智光國師は高麗成宗3年(984)生で、俗假名は海麟. 穆宗2年(999)に龍興寺で具足戒を受けた.
歷代王の優待を受け、三重大師, 僧統になった後、文宗12年(1058)國師になった.
1070年84歲でここ法泉寺で入寂し、文宗は彼に諡號と塔銘を与えた.
彼の行績を綴った碑文は當代の名臣鄭惟産が作り、名筆安民厚が書いた.
文字は歐陽詢體を基本として柔らかさと端麗さを追求した.
寺の跡には獨特な樣式の智光國師玄妙塔があったが現在景福宮に移されている.
<資料出處及び參照: 文化財廳, 韓國民族文化大百科>
국보제59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대 : 고려시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1085년(선종 2) 건립.전체높이 455㎝, 비신높이 295㎝, 너비 141㎝.
고려시대 석비를 대표할만한 걸작으로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비신 옆면에 새긴
운룡조각과 귀부의 귀갑문 안에 새긴 ‘王’자 등이 매우 특이하다.
또한, 비면 가장자리에 새긴 寶相唐草紋이나 이수(螭首)의 네 귀퉁이에 단
귀꽃 및 이수 중앙의 상륜부가 매우 화려하다.
귀부(龜跌)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龍頭化)된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다. 등에는 네모 구획 안에 따로 귀갑문을 새겼으며
다시 그 안에 ‘와(瓦)’자를 양각했다. 등의 중앙에는 간결한 복련의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바깥 둘레에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며 양 측면에 쌍룡을 조각한 것도 특이하다. 이수는
모자를 쓴 듯한 형태이며 네 귀에 전각이 뚜렷하고 귀꽃이 있다.
이수 중앙에 상륜부를 두어 보주를 얹었다.
지광국사는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났는데 속가명은 해린(海麟)이다.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역대 왕의우대를 받았으며
삼중대사, 승통이 된 후 문종 12년(1058)에 국사가 되었다.
1070년 이곳 법천사에서 84세로 법천사에서 입적하자 문종은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적은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유산이 짓고 명필 안민후가 썼다.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였다. 한편,
절터에는 독특한 양식의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현재 경복궁에 옮겨져 있다.
<자료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민속문양 [民俗紋樣]' 카테고리의 다른 글
國寶61號 : 靑磁魚龍形注子 - 청자 어룡 주전자 (0) | 2014.01.16 |
---|---|
國寶60號:靑磁獅子鈕蓋香爐 국보60호:청자사자유개향로 (0) | 2013.11.30 |
國寶第58號 : 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2) | 2013.07.28 |
國寶第57號 : 雙峰寺澈鑒禪師塔 쌍봉사철갑선사탑 (2) | 2013.06.22 |
檀園風俗圖帖 단원풍속도첩 (1) | 2013.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