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비, 그리고 햇살 (속) - 기행문 [紀行文]
그처럼 골탕을 먹인 것을 사죄라도 하듯 다음날 아침은 맑고 화창했다. 아침을 먹고
키누가와온천장을 뒤로했다. 딸아인 열심히 약을 먹고 온천도 극성맞게 두번씩이나
일찍 서둘렀기 때문에 열한시도 되기 전에 도쿄의 아사쿠사역에 도착했다.
우선 카미나리몽(雷門)을 구경하기로 하고 나카미세(仲見世)쪽으로 걸어가는데, 시계를
세일하는 가게가 눈에띄었다. 용케도 시계없이 분초를 쪼개쓰는 나라에서 버텼다면서
우선 딸아이 시계를 하나 사기로 한다. 딸아인 남자 팔목에나 어울릴것 같은 큼지막한
7천엔짜리 시계를 골랐다.
아사쿠사칸논지(淺草觀音寺) 경내에는 아이들 데리고나온 구경꾼이 걸음을 옮길수 없을정도로
바글거린다. 일본의 서민들이 사랑하는 절이라나, 마당 한가운데 큼지막한 화로에 향을 잔뜩
피워놓은 곳이 있는데, 모두들 두손으로 그 연기를 받아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몸안의 사악함을
털어내는 의식인가..?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마당 한켠에 그날의 운수 보는 통이 있었다. 백엔을 넣고 통을 흔들어 막대 하나를 뽑은 뒤
그 막대에 씌어있는 번호와 같은 서랍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보면 거기에 토정비결의 5분의1
만큼의 운수풀이가 적혀 있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딸아이가 백엔을 넣고 해 봤더니
소길(小吉)이 나왔다. 엄마도 해보란다. 난 돈을 넣지 않고 그냥 하나 뽑았다. 그랬더니,
맙소사! 흉(凶)이 나오는게 아닌가. 부처님 앞에서 사기 쳤으니 흉이 안나오면 이상한거지'
난 농담조로 주절거리고 종이를 구겨 버렸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지금 몇시냐?' '열한시 20분' '뭐?' 일본도 세일 물건은 별 수 없는지 채 30분도 못가고
새 시계가 멈춰버린 것이다. 미로처럼 헷갈리는 골목을 누비면서 그 점포를 찾아내어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난 두번이나 '대장부(大丈夫-다이죠부)?'를 찾았고, 젊은남자판매원이
염려말라고, 믿으라고 했던 것이 세시간 후에 또 멈춰버릴 줄이야!
아무튼 우린 그 곳에서 빠져나와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 유람선을 탔다. 그런데, 이건
실망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왕실망이다. 물론 세느강변을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쿄의 유명한 스미다가와를 거슬러 올라가니 뭔가 그들 나름의 운치가 있을줄 알았는데
한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볼게 없었다. 강폭도 좁고 지저분하고 걸려있는 다리도 그저
다리일 뿐이었다.
하마리큐(邊離宮)공원에서 하선하여 고즈넉한 공원을 거닐었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잘 정돈된 깨끗한 공원이었다.
신바시(新橋)로 나와 긴자(銀座)에 접어드니 차 없는 공휴일 거리는 보행천국이었다.
자그마한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점심 식사를 들면서 모처럼 모녀가 기분을 낸다.
서브하는 웨이터는 머리가 하얀 이태리 노인이고 주방장은 굽슬굽슬한 장발의 미남청년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기로 하고 시간을 물었더니 아아, 또 주무신다는거다. 이 때는 정말 열이
뻗쳤다. 긴자에서 아사쿠사까지 되돌아갔다가 다시 이케부쿠로로 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같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지하철을 찾아 타고... 겨우 그 가게를 찾아 불쑥 시계를 내밀고 환불해
달라고 했다. 내가 유창하게 일본말을 할 줄 모르는게 천추의 한, 그래도 톤을높여 긴자에서
여기까지 되돌아 왔다고 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몇번씩 허리를 굽히면서 내 주는 돈을
받으며, 흉(凶)이 나올 정도로 고약한 그날 일진 탓이려니 마음을 돌려본다.
가사(假死)상태가 되어 기다시피 호텔에 다다랐다.
오늘은 도쿄의 마지막 밤, 이대로 호텔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고 우린 벌떡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시부야역에서 내려 하치코(ハチ公) 동상이 있는 출구로 나오니, 그야말로 각양각색
각종 젊은이들이 넓은 광장에 꽉 들어차 있었다. 인파에 밀리면서 별난아이들 구경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혼자 이방인같아 멋쩍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일뿐 아무도 내게 눈길하나 주지않는다.
우린 혹시나 이산가족이 될까봐 팔을 꼭 끼고 시부야의 야경 속에 파묻혔다.
목이 말랐다. 하지만 모녀가 들어갈만한 만만한 호프집을 낯선 젊은이왕국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실컷 다리품만 팔고는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꽤 늦은 시간인듯 한데
시계가 없으니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속으로 아사쿠사 시계점에 욕을 퍼부었다.
이케부쿠로 역 분위기가 하도 험악(?)해서 조금 돌아 조용한 거리로 접어들었더니 그 곳
어두컴컴한 데에는 동남아계로 보이는 밤거리 여인들이 괴상한 옷차림을하고 무리지어
서서 우릴 힐끔거린다. 달음질은 칠 수 없어 종종걸음으로 잽싸게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호텔 앞의 레스토랑 불빛이 우릴 유혹한다. 반 2층으로 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터번 쓴 웨이터가 미소를 띄며 이랏샤이마세 한다. 알고보니 파키스탄 음식점이었다.
우선 맥주 한병을 시키고 한참 메뉴와 씨름을 한 끝에 파키스탄식 어쩌구하는 빵종류와
닭다리를 어찌어찌 만들었다는 요리를 시켰다.
적당히 차가운 맥주 한컵이 종일 시달린 내 몸을 달래준다.
'엄마 한병 더 시키자'.
우리는 조용한 창가에서 맞은편 우리 호텔의 네온을 바라보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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