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렌자부로(柴田錬三郎의 수필 중에서(속)
* 영혼에 대하여
나는 일종의 운명론자이고, 또 성경 같은 것도 상당히 자세히 읽고 있는 남자이지만, 영혼의 불멸이라거나 유령의 존재 같은 건 전혀 믿지 않는다. 지극히 비정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래서 네무레쿄시로(眠狂四郞: 소설의 주인공)가 여행 중에 토속적인 괴이(怪異)를 보면 사리사욕을 지키는 자의 짓이라고 명쾌하게 밝히는 것이다.
가령 어느 신쥬(信州)의 산속을 지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게(偈)가 새겨져있는 석탑을 발견한다.
[浅間山下 渓水津津 若供一杓 便是至仁]
인적이 끊긴 심산에는 곧잘 이런 공양을 위한 탑이 당시에는 세워졌다. 음습하고 괴이한 전설을 살아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 변덕의 단골이 되어 사망한 사람을 위해 그런 공양탑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쿄시로(狂四郞)라는 사나이는 그런 걸 보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차가운 의식이 끓어오른다. ---겁 많은 人間의 무능함이 요괴의 구역을 정해놓고, 요망한 귀신을 만들어 내어 겁먹고 굴복토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멍청함이 인간을 선량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도 한번 해질 무렵의 환각을 일으켜 보리라.
그래서 쿄시로의 싸늘하고 예리해진 감각이 공양탑을 세운 게 사리사욕에 얽힌 인간의 짓임을 밝혀낸다, 그런 스토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쿄시로를 쓰는 이상 난 필경 허무맹랑한 도깨비 따윈 완전히 부정할 것이다.
이런 작가인 나 자신이 우연 치고는 너무도 이상한 영혼의 작용과 유령 같은 걸 만난 경험을 했으니 어이가 없다.
쇼와(昭和)15년 여름 나는 모가미가와(最上川)에서 헤엄쳐 일본 3대 급류를 왕복한 일이 있다. 호수 같은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서밖에 헤엄친 경험이 없는 나는 강의 급류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반대편 기슭에 헤엄쳐 다다랐을 때 나는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기진맥진해있었다. 하지만 묘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한숨을 돌린 뒤 또다시 급류를 헤엄쳐 되돌아왔다. 이끼 낀 돌의 미끈미끈한 얕은 여울에 당도하였을 때 나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절반이라기보다 거의 숨이 끊긴 ,사자의 모양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숙소로 업혀왔을 때 달려온 의사가 절망적인 선언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난 겨우 두 시간만에 의식과 생기를 되찾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바로 내가 의식을 잃은 그 시각에 오카야마의 고향에서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쓸어져, 내가 모가미가와 근처 숙소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내가 생기를 되찾은 때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때가 일분일초도 차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 대신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닌지.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주 뇌리에 떠오른다.
또 하나는 고야산(高野山) 기슭의 폐업한 한 여관에 묵었을 때 이야기다. 숙박한 최상급 방에서 잠들 때 마다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잠에서 깨어나 기분이 나빠진 나는, 동행한 [週間新潮]의 아소(麻生)군에게 방을 바꿔 달랬다. 그런데 아소군도 나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그 방에서 13년 동안 결핵으로 누워있던 주인이 기어이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수년전의 실화다. 이렇게 되면 유령의 존재를 어쩐지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요.
*눈물에 대하여
여성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우는 광경을 우리들은 지겹도록 보아왔다. 유행가수 등은 무슨무슨상을 받자마자 끊임없이 우는데, 참으로 우스꽝스런 행동이다. 상을 받았으면 좋아서 동동 뛰면 되지 않겠는가.
슬퍼서 우는 거라면 말이 되는데, 좋아서 운다는 건 어쩐지 여성 본질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애당초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는 지극히 간단한 생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실연을 한다거나 육친을 잃거나 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흐느껴 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사는 동안에 그렇게 자주 경험하는 일은 아니다.
여성이 우는 건 대다수의 경우 무의미한 생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 증거로 여성들에게는 따라 우는 습성이 있는데, 이것처럼 멍청한, 단세포적인 센티멘달리즘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같은 일로 한꺼번에 부모형제를 잃은 불행한 고아의 삶이 텔레비전에서 소개되었을 때 여성들은 따라 운다. 하지만 이 아이를 위해 쌈짓돈을 털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따라 울고나 서는 천연스럽게 ‘나 요즘 주름이 늘었어. 어떻게 하면 이 눈가 주름을 없앨 수 있을까. 아예 정형외과로 가볼까’ 라는 등, 생각을 휙 바꾼다.
그러나 남성은 당시에는 아무말 없이 별로 감동한 모습도 나타내지 않으나, 나중에 남 몰래 그 아이를 위해 10만엔을 가볍게 던져준다.
예전에, 기쿠치칸(菊池寬)이 통속소설의 대히트로 대유행작가가 되었을 때, 남몰래 고아원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자세를 여성은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년시대의 나는 대단한 장난꾸러기로, 곧잘 같은 반 여자아이를 붙들고는 ‘너 지금 운다! 자, 울어! 봐, 금세 눈물이 나오지!’ 하면서 골려주었다. 내게 그 말을 들은 여자아이는 점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줄줄 볼로 흐르는 것이었다.
못된 짓을 당해 슬퍼 우는 게 아니었다. 울어 울어, 하고 재촉하는 동안 왠지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뭐 나도 여성의 다정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젊은 여성은 결혼 조건의 하나로 ‘다정한 사람’을 꼽는데, 이 다정함이 따라 울기 잘하는 남성을 말하는 거라면 남편으로서 실격이라는 걸 여성들은 알아야 한다.
표면에 다정함을 나타내 보이는 사나이는 한번 뒤로 돌아가면 냉혹 비정한 귀신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중성적인 사나이는 반드시 지킬박사와 하이드 처럼 2율 배반적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눈물이라는 건 원래 달콤함을 포함하고 있다. 실연한 여성은 열흘이건 스무날이건 울면서 지낸다. 하지만 우는 일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묘한 쾌감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별로 동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