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밭과 바흐」- 타치하라마사아키(立原正秋)
서재 북쪽에 작은 대밭이 있다. 매해 봄이 되면 열개 안팎의 새순이 나온다.
작년에는 열댓개가 나와 다섯개 정도를 식탁에 올리고 나머지는 키웠다.
그 대신 오래된 대를 잘랐다.
올해 4월 중순에 며칠 교토(京都)와 시가라기(信樂)에 다녀왔는데, 그 때는
아직 순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새순이 세개 나와 있었다.
새벽녘에 일을 끝내고 서재에서 나오다가 보니 순이 꼭 열개 있었다.
열시쯤 일어나 식사 때 한개 뽑았기 때문에 현재는 아홉개다. 또 나올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대를 자를 수만큼만 키우기로 하고 나머지는 식탁에 올린다.
근처에 사는 오카마쓰가즈오(岡松和夫)에게 전화를 걸고 죽순을 줄테니
오지 않겠느냐 묻자 온다고 한다. 그가 돌아갈 때쯤 파서 부지런히
가지고 가라 할 작정이다. 바로 파낸 걸 삶으면 떫지가 않다.
사실은 바라보기 위해 이식한 대나무였다. 작은 대밭이니 밥상에 올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다. 어쨌거나 서재 창문으로 순이 나오는 걸 바라보는 건
참으로 즐겁다.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또 키가 컸구나, 금세 안다.
대밭 둘레의 통로를 콘크리트로 굳혀놔서 대는 세평 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
가엾다고 생각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순이 나오기 시작하면 대 잎에서 오래된 이파리가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한참만에
새로운 이파리가 나온다. 새 이파리가 가지런해지면 벌써 초여름이다.
맞아, 바하를 듣던 게 작년 이맘때였지, 하면서 일년전을 떠올린다.
젊었을 때처럼 집중적으로 레코드를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년에 몇차례는
집중적으로 듣는 날이 있다.
그럼 올 봄도 바하를 들어볼까, 하고 나는 어느날 오후 서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천정까지 뻥 뚫린 널찍한 층계참이 있어 거기에 스테레오가
설치되어 있다.
서쪽 창문을 열면 한 면이 신록의 산이다. 복도 끝에 있는 다용도실 창을 열면
거기가 바로 서제 북쪽이라 대밭이 보인다. 이런 풍경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
고지대여서 집 뒤가 산이기 때문에 소리를 크게 해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다.
바흐의 [2성 인벤션] [파사카리아와 퓨가] [브란델브르그협주곡] 을 이어 듣는다.
음이 신록 저편으로 빠져나가고, 대밭 쪽으로도 흘러간다. 젊었을 때, 바흐와
모차르트에서 느낌을 받아 [근대문학]과 [문학계]에 몇편의 단편을 썼지만
이 두 사람으로부터 받은 감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버지의 영향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아이도 곧잘 바로크 음악을 듣고 있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정신적인 인식으로도 받아들이라고 이르는데, 알았는지 몰랐는지.
음악의 생무지인 나는 어떤 곡을 듣고 소화작용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해 한다.
이 소화작용은 문학작품이나 회화, 도자기, 연극에서도 받아들이지만 음악의 경우가
가장 직접적이다. 나의 경우 바흐와 모차르트라고 생각한다. [2성 인벤션]은
군더더기를 깎아낸 문체를 느끼게 한다.
나는 거의 반나절 동안 바흐를 들었다. 예전에는 온종일 들은적도 있다. 종일 듣는 일이
며칠씩 이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이젠 그만한 체력이 없다. 며칠 사이를 둔 다음
이번에는 모차르트를 반나절 들을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대밭도 확실히 모양새를
갖추리라.
[수필집 '몽환 속에서' 가운데 한 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