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인생의 막간(幕間)' -중국 삼협뱃길 여행(1)- 스기모토 타케시 저
yoohyun
2003. 3. 17. 10:35
의학박사이신 스기모토 타케시(杉本毅)님의 수필, '인생의 막간((Intermission of the Life)'을 조금씩 번역하여 여기에 올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崔成子 拜
--------------
1. PC 접속의 즐거움
1997년 4월, 두 번째로 중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먼저는 북경(北京) 서안(西安) 돈황(敦煌)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이번에는 삼협(三峽)뱃길 여행이 주목적인데, 그와 함께 두보와 제갈공명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중경(重慶) 무한(武漢)도 들른다는 흥미로운 코스였다.
헌데 이번에는 내게 또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중국의 오지에서 PC로 일본 니프티(포탈 사이트)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으로 일본 친구들과 통신 하고, 또 매일 쌓이는 정보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귀국 후 산더미 같이 밀린 메일에 파묻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포터블 PC는 꽤 전에 구입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익숙했지만, 접속 코드와 변압기등의 구입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뒤, 겨우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 스케줄은 언제나 의사회 간사들과 여행사의 H씨, K씨. 안심하고 맡길 사람들이다. 일행 열명은 여행사로서는 좀 어려운 숫자였던 모양이나, 중국여행에는 딱 알맞는 인원수였다. 다 아는것처럼 중국요리는 한 테이블이 열명이기 때문에, 두 테이블로 갈라지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2. 성도에서 낙산으로
4월 26일 13시30분 상해에 도착, 중국 서남항공으로 갈아타고 곧바로 성도로 향했다. 오래된 도시답게 차분한 느낌의 도시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진(陳)마파두부점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오성맥주로 건배, 소흥주(紹興酒)를 곁들여 먹으니 매운 음식도 술술 넘어간다.
호텔에 들자마자 인터넷 접속을 시도해 봤으나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연결이 안된다. 시차가 거의 없다고는 해도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침대에 들어가자 금새 잠이 들었다.
다음 27일은 성도에서 버스를 타고 아미산(峨眉山)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국 4대 영장(靈場)으로, 보국사(報國寺)가 입구에 있다. 산기슭에 보물전이 있는데 수많은 나한상이 볼만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더위에 지친다. 모두가 중국의 오지이니 추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했고, 이렇게 더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사원은 아쉽지만 단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본인도 그렇지만 중국인의 신앙심이야말로 대단하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이어 우리들의 버스는 낙산에 도착, 대불(大佛)로 유명한 능운사(凌雲寺)를 찾았다. 대불은 뱃길의 안전을 빌기 위해 능운산 절벽에 조각된 것으로,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대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우선 배를 타고 강에서 바라보고, 다음에 버스로 산정에 올라, 꼭대기에서 돌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비는, 그런 취향이었다. 발상과 스케일의 거대함에 감탄하면서 깊은 신앙심에 놀란다.
그날은 낙산에서 숙박했다. 낙산요리를 음미하고 서둘러 통신을 시도했으나, 전화 단말기가 구식이고, 프런트와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능액(五凌液)이라는 독하지만 맛좋은 술과 함께 먹은 누룽지요리가 일품이었다.
3. 낙산에서 성도로 - 일본과의 통신에 성공
4월 28일(월) 맑음
버스로 150킬로를 달려 성도로 되돌아와 점심식사, 이어 무후사(武侯祠)를 방문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모신 곳이다. 삼국지의 세계였다. 관우, 장비, 유비등 기억에 남은 무장상이 차례로 나타난다. 중학생시절이 떠올랐다. 한문에 무장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재미있어 한문시간을 고대했다. 아마 좋은 선생이었기 때문이리라.
계속해서 두보초당을 찾았다. 두보는 이곳에 4년 정도 머무르면서 240여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훌륭한 대나무숲에 둘러싸여, 유명한 시를 새긴 돌비석도 많았으며, 시정(詩情) 또한 풍부한 곳으로서, 이를 에워싼 적벽도 인상적이었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현지 가이드 왕씨와 두씨는 박식하여 우리를 당나라시대로 유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제 묵은 호텔로 되돌아와 사천요리를 즐긴다. 매운맛에도 익숙해져 참맛을 알 것 같다. 술이 모자라는 친구들은 바(bar)로 향했으나, 나는 오늘밤에는 반드시 PC로 일본에 접속하리라 맘먹고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왔다. 싱크패트535를 꺼내어 설정을 시작한다. 시외번호를 쳐서 니프티 화면을 나오게 한 다음 전화 아이콘을 클릭하고 귀를 기울인다. 연결이 안된다. 다시 처음부터 해본다. 조금만 더. 이윽고 11시20분이 지나자 삐이 하는 연결시의 접속음, 드디어 연결되었다. 눈에 익은 에프멜로(니프티 속의 포럼 중 하나)의 핼로 메시지, 써 두었던 메일이 전송되었다고 화면에 나타나고, 회의실 로고가 흐른다. 너무도 감격하여 가슴이 벅차다. 한방을 쓰는 G씨와 맥주로 건배했다. 26일부터 쌓인 3일간의 메일을 탐독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보낼 수 있도록 답장을 써둔다. 국제전화로 도쿄의 M씨에게 배운 덕택이다. 한시 넘어 겨우 침대에 들었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4. 성도에서 중경으로
오늘(29일) 출발은 아홉시. 그 전에 인터넷접속이다. 이젠 한방에 연결된다. 열어보니 중국에서의 접속에 대한 놀라움과 축하의 메시지로 그득했다. 칸사이 M씨의 [아니, 중국으로부터의 메시지라니! 중국에서 메시지 받기는 처음입니다. 회의실로의 발신도 당신이 처음입니다] 라는 메일을 중경에서 받았다. 이렇게 반응이 클 줄은 예상밖이다.
오늘 스케줄은 버스로 대족(大足)의 불상을 보고 중경으로 가는 코스. 쾌청한 건 좋은데 무척 덥다. 대형버스로 대족에 도착했다. 구경 전에 먼저 점심이다. 이런 시골에, 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훌륭한 호텔. 그 곳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니 예상밖의 무더위 때문인지 맛이 좋다. 뒤돌아보니 20명 정도의 외국인. 물론 우리들도 외국인에 속하지만, 귀에 들어오는 말이 틀림없는 독일어다. 어디에서? 라고 물으니 뮨헨이라고 한다. 몇마디 주고 받는데 떠나야 한다고 재촉이다. 나중에 이 독일인들과 한배를 타고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 도로 수리중이라 하여 소형버스에 올랐다. 울퉁불퉁한 고약한 길의 연속이다. 게다가 팔걸이도 붙잡을 손잡이도 없는 고물 버스. 무섭게 흔들렸다. 밥통이 심장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머리는 천장에 부딪힐 지경. 10킬로 정도의 악전고투 끝에 겨우 보정산(寶頂山)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애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허리에 조각된 1만5천구에 달하는 불상이 늘어선 석굴에 그저 압도당할 뿐이었다. 이곳 석조는 송(宋)대에 만들어졌다고.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또다시 악로(惡路)를 거쳐 중경에 도착했을 때는 관광도 편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각지에서 만나는 일본인도 대족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급사의 차 서비스에 놀란다. 1미터나 되는 주둥이가 달린 적동색 주전자로 떨어진 곳에서 흘리지도 않고 찻잔에 따르는 것이다. 감탄하면서 중경요리에 입맛을 다신다. 식후에는 바의 유혹을 참고 방으로 서둘렀다. 아니, 참는 게 아니다. PC의 매력에 끌려서 라는 말이 옳다. 접속도 이젠 걱정 없다. 도쿄뿐만 아니라 전일본 포럼친구의 정보를 단숨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도쿄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글을 한바탕 읽은 다음 이번에는 내정해 두었던 [중국 단신 (1)]을 나의 포럼을 위해 쓰기 시작한다.
5. 중경(重慶)의 인상
오늘, 4월 30일(수)은 중경 체제라 느긋하다. 아침을 먹은 다음 바로 어젯밤에 쓰다 만 단신을 마저 써서 내가 속해있는 멜로포럼에 띄웠다. 하루에 한편씩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겨우 작업을 끝내고 근처 시장구경에 나섰다. 야채, 과일, 새끼돼지의 통구이 등 먹거리가 풍부하다. 눈앞에서 익숙하게 장어를 가르는 아주머니, 곁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몇 개 걸려있다. 신기한 건 연탄을 만들고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중일전쟁 시대, 국민당정부의 임시 수도가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인구 1400만명이라는 세계제일의 인구를 지닌 대도시이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를 거의 볼 수 없는 건 언덕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민보관에서 누룽지요리 점심을 든 다음 시립박물관에서 공룡과 자기, 청동기 등을 본다. 중경은 반도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뉴욕과 비슷하나, 언덕이 많은 점이 전혀 달랐다.
저녁식사 후에는 도쿄와 통신, 그리고 중국 단신의 속편을 노트북에 두드린다. -계속-
--------------
1. PC 접속의 즐거움
1997년 4월, 두 번째로 중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먼저는 북경(北京) 서안(西安) 돈황(敦煌)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이번에는 삼협(三峽)뱃길 여행이 주목적인데, 그와 함께 두보와 제갈공명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중경(重慶) 무한(武漢)도 들른다는 흥미로운 코스였다.
헌데 이번에는 내게 또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중국의 오지에서 PC로 일본 니프티(포탈 사이트)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으로 일본 친구들과 통신 하고, 또 매일 쌓이는 정보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귀국 후 산더미 같이 밀린 메일에 파묻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포터블 PC는 꽤 전에 구입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익숙했지만, 접속 코드와 변압기등의 구입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뒤, 겨우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여행 스케줄은 언제나 의사회 간사들과 여행사의 H씨, K씨. 안심하고 맡길 사람들이다. 일행 열명은 여행사로서는 좀 어려운 숫자였던 모양이나, 중국여행에는 딱 알맞는 인원수였다. 다 아는것처럼 중국요리는 한 테이블이 열명이기 때문에, 두 테이블로 갈라지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2. 성도에서 낙산으로
4월 26일 13시30분 상해에 도착, 중국 서남항공으로 갈아타고 곧바로 성도로 향했다. 오래된 도시답게 차분한 느낌의 도시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진(陳)마파두부점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오성맥주로 건배, 소흥주(紹興酒)를 곁들여 먹으니 매운 음식도 술술 넘어간다.
호텔에 들자마자 인터넷 접속을 시도해 봤으나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연결이 안된다. 시차가 거의 없다고는 해도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침대에 들어가자 금새 잠이 들었다.
다음 27일은 성도에서 버스를 타고 아미산(峨眉山)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국 4대 영장(靈場)으로, 보국사(報國寺)가 입구에 있다. 산기슭에 보물전이 있는데 수많은 나한상이 볼만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더위에 지친다. 모두가 중국의 오지이니 추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했고, 이렇게 더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사원은 아쉽지만 단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본인도 그렇지만 중국인의 신앙심이야말로 대단하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이어 우리들의 버스는 낙산에 도착, 대불(大佛)로 유명한 능운사(凌雲寺)를 찾았다. 대불은 뱃길의 안전을 빌기 위해 능운산 절벽에 조각된 것으로,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대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우선 배를 타고 강에서 바라보고, 다음에 버스로 산정에 올라, 꼭대기에서 돌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비는, 그런 취향이었다. 발상과 스케일의 거대함에 감탄하면서 깊은 신앙심에 놀란다.
그날은 낙산에서 숙박했다. 낙산요리를 음미하고 서둘러 통신을 시도했으나, 전화 단말기가 구식이고, 프런트와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능액(五凌液)이라는 독하지만 맛좋은 술과 함께 먹은 누룽지요리가 일품이었다.
3. 낙산에서 성도로 - 일본과의 통신에 성공
4월 28일(월) 맑음
버스로 150킬로를 달려 성도로 되돌아와 점심식사, 이어 무후사(武侯祠)를 방문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모신 곳이다. 삼국지의 세계였다. 관우, 장비, 유비등 기억에 남은 무장상이 차례로 나타난다. 중학생시절이 떠올랐다. 한문에 무장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재미있어 한문시간을 고대했다. 아마 좋은 선생이었기 때문이리라.
계속해서 두보초당을 찾았다. 두보는 이곳에 4년 정도 머무르면서 240여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훌륭한 대나무숲에 둘러싸여, 유명한 시를 새긴 돌비석도 많았으며, 시정(詩情) 또한 풍부한 곳으로서, 이를 에워싼 적벽도 인상적이었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현지 가이드 왕씨와 두씨는 박식하여 우리를 당나라시대로 유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제 묵은 호텔로 되돌아와 사천요리를 즐긴다. 매운맛에도 익숙해져 참맛을 알 것 같다. 술이 모자라는 친구들은 바(bar)로 향했으나, 나는 오늘밤에는 반드시 PC로 일본에 접속하리라 맘먹고 부지런히 방으로 돌아왔다. 싱크패트535를 꺼내어 설정을 시작한다. 시외번호를 쳐서 니프티 화면을 나오게 한 다음 전화 아이콘을 클릭하고 귀를 기울인다. 연결이 안된다. 다시 처음부터 해본다. 조금만 더. 이윽고 11시20분이 지나자 삐이 하는 연결시의 접속음, 드디어 연결되었다. 눈에 익은 에프멜로(니프티 속의 포럼 중 하나)의 핼로 메시지, 써 두었던 메일이 전송되었다고 화면에 나타나고, 회의실 로고가 흐른다. 너무도 감격하여 가슴이 벅차다. 한방을 쓰는 G씨와 맥주로 건배했다. 26일부터 쌓인 3일간의 메일을 탐독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보낼 수 있도록 답장을 써둔다. 국제전화로 도쿄의 M씨에게 배운 덕택이다. 한시 넘어 겨우 침대에 들었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4. 성도에서 중경으로
오늘(29일) 출발은 아홉시. 그 전에 인터넷접속이다. 이젠 한방에 연결된다. 열어보니 중국에서의 접속에 대한 놀라움과 축하의 메시지로 그득했다. 칸사이 M씨의 [아니, 중국으로부터의 메시지라니! 중국에서 메시지 받기는 처음입니다. 회의실로의 발신도 당신이 처음입니다] 라는 메일을 중경에서 받았다. 이렇게 반응이 클 줄은 예상밖이다.
오늘 스케줄은 버스로 대족(大足)의 불상을 보고 중경으로 가는 코스. 쾌청한 건 좋은데 무척 덥다. 대형버스로 대족에 도착했다. 구경 전에 먼저 점심이다. 이런 시골에, 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훌륭한 호텔. 그 곳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니 예상밖의 무더위 때문인지 맛이 좋다. 뒤돌아보니 20명 정도의 외국인. 물론 우리들도 외국인에 속하지만, 귀에 들어오는 말이 틀림없는 독일어다. 어디에서? 라고 물으니 뮨헨이라고 한다. 몇마디 주고 받는데 떠나야 한다고 재촉이다. 나중에 이 독일인들과 한배를 타고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 도로 수리중이라 하여 소형버스에 올랐다. 울퉁불퉁한 고약한 길의 연속이다. 게다가 팔걸이도 붙잡을 손잡이도 없는 고물 버스. 무섭게 흔들렸다. 밥통이 심장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머리는 천장에 부딪힐 지경. 10킬로 정도의 악전고투 끝에 겨우 보정산(寶頂山)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애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허리에 조각된 1만5천구에 달하는 불상이 늘어선 석굴에 그저 압도당할 뿐이었다. 이곳 석조는 송(宋)대에 만들어졌다고.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또다시 악로(惡路)를 거쳐 중경에 도착했을 때는 관광도 편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각지에서 만나는 일본인도 대족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급사의 차 서비스에 놀란다. 1미터나 되는 주둥이가 달린 적동색 주전자로 떨어진 곳에서 흘리지도 않고 찻잔에 따르는 것이다. 감탄하면서 중경요리에 입맛을 다신다. 식후에는 바의 유혹을 참고 방으로 서둘렀다. 아니, 참는 게 아니다. PC의 매력에 끌려서 라는 말이 옳다. 접속도 이젠 걱정 없다. 도쿄뿐만 아니라 전일본 포럼친구의 정보를 단숨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도쿄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글을 한바탕 읽은 다음 이번에는 내정해 두었던 [중국 단신 (1)]을 나의 포럼을 위해 쓰기 시작한다.
5. 중경(重慶)의 인상
오늘, 4월 30일(수)은 중경 체제라 느긋하다. 아침을 먹은 다음 바로 어젯밤에 쓰다 만 단신을 마저 써서 내가 속해있는 멜로포럼에 띄웠다. 하루에 한편씩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겨우 작업을 끝내고 근처 시장구경에 나섰다. 야채, 과일, 새끼돼지의 통구이 등 먹거리가 풍부하다. 눈앞에서 익숙하게 장어를 가르는 아주머니, 곁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몇 개 걸려있다. 신기한 건 연탄을 만들고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중일전쟁 시대, 국민당정부의 임시 수도가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인구 1400만명이라는 세계제일의 인구를 지닌 대도시이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를 거의 볼 수 없는 건 언덕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민보관에서 누룽지요리 점심을 든 다음 시립박물관에서 공룡과 자기, 청동기 등을 본다. 중경은 반도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뉴욕과 비슷하나, 언덕이 많은 점이 전혀 달랐다.
저녁식사 후에는 도쿄와 통신, 그리고 중국 단신의 속편을 노트북에 두드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