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일본에 대한 토막 상식 -1-
yoohyun
2003. 3. 12. 00:07
*日本이란 국명의 유래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래전에는 [오오야시마(大八洲)], [아키츠시마(秋津島)] [아시바라나카츠쿠니(葦原中國)] [야마토(大和)]등이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왜(倭)]라고 불렀다.
그것이 [일본]으로 결정된 것은 타이호 원년(大寶元年-701년)에 제정된 타이호 율령(律令)에 의해서이다. 타이호 율령은 가장 오래전에 완성된 성문법으로, 이 나라는 탄생될 때부터 [日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호 율령 시대에는 일본(日本)이라 쓰고 [야마토]나 [히노모토]라 읽었는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자 한자의 지식이 확산되어 훈독이 아닌 음독으로 [니호무]라 발음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흘러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동국(東國)의 발음으로 [니혼] 또는 [닛폰]이라고 읽게 된 것이다.
현재는 니혼, 닛폰 어느쪽으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쇼와 9년(1934년)의 문부성 임시국어조사회에 의해, 한 때는 [닛폰]이라는 호칭으로 통제되기도 했다.
영어로 저팬이라 읽는 것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실린 [지팡그(ジパング-황금의 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교토(京都)는 왜 수도가 되지 못했을까?
교토는 칸무텐노(桓武天皇)가 이 땅에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고부터 일시적인 후쿠하라 천도가 있긴 했어도 천년동안이나 일본의 수도로서 번창해 왔다. 그러던 것이, 토쿠가와(德川)막부가 탄탄한 봉건사회를 에도(江戶)에 건설하자, 정치 문화의 중심은 자연히 에도로 이전되고, 쿄토는 차츰 존재가 희미해졌다.
그 후 바쿠마츠(幕末)에 이르어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슬로건이 대두되자 다시 교토가 클로즈업되고, 명치유신의 무대가 되었다. 게이오(慶應)3년 왕정복고령이 내렸을 때, 교토 주민들은 다시 교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믿고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쿄토에 있었던 시기는 겨우 1년, 메이지 2년(1869년) 10월에는 [도쿄(東京)]라고 이름을 바꾼 에도로 이전되고 말았다.
도쿄 천도를 계획한 사람은 오쿠보토시미치(大久保利通)이다. 오쿠보는, 천황은 구름 위의 존재이어서는 안되며, 이제부터 인민 속으로 거듭나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관습에 젖은 교토를 벗어나 천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곧, 조정을 실질적인 권력으로 삼자는 시위가 바로 천도(遷都)였다. 이 속에는 지금까지 일본의 중심이었던 관동인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관동인(關東人)의 마음은 아직 막부에 남아 있기 때문에 신정부는 에도시민의 마음을 시급히 다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교토시민은 물론 도쿄 천도에 반대했으나, 천황의 도쿄 이전의 대가로 지세(地稅)의 일시적인 면제와, 15만량의 [산업 기금]을 푸는 것으로 해결했다.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래전에는 [오오야시마(大八洲)], [아키츠시마(秋津島)] [아시바라나카츠쿠니(葦原中國)] [야마토(大和)]등이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왜(倭)]라고 불렀다.
그것이 [일본]으로 결정된 것은 타이호 원년(大寶元年-701년)에 제정된 타이호 율령(律令)에 의해서이다. 타이호 율령은 가장 오래전에 완성된 성문법으로, 이 나라는 탄생될 때부터 [日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호 율령 시대에는 일본(日本)이라 쓰고 [야마토]나 [히노모토]라 읽었는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자 한자의 지식이 확산되어 훈독이 아닌 음독으로 [니호무]라 발음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흘러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동국(東國)의 발음으로 [니혼] 또는 [닛폰]이라고 읽게 된 것이다.
현재는 니혼, 닛폰 어느쪽으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쇼와 9년(1934년)의 문부성 임시국어조사회에 의해, 한 때는 [닛폰]이라는 호칭으로 통제되기도 했다.
영어로 저팬이라 읽는 것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실린 [지팡그(ジパング-황금의 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교토(京都)는 왜 수도가 되지 못했을까?
교토는 칸무텐노(桓武天皇)가 이 땅에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고부터 일시적인 후쿠하라 천도가 있긴 했어도 천년동안이나 일본의 수도로서 번창해 왔다. 그러던 것이, 토쿠가와(德川)막부가 탄탄한 봉건사회를 에도(江戶)에 건설하자, 정치 문화의 중심은 자연히 에도로 이전되고, 쿄토는 차츰 존재가 희미해졌다.
그 후 바쿠마츠(幕末)에 이르어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슬로건이 대두되자 다시 교토가 클로즈업되고, 명치유신의 무대가 되었다. 게이오(慶應)3년 왕정복고령이 내렸을 때, 교토 주민들은 다시 교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믿고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쿄토에 있었던 시기는 겨우 1년, 메이지 2년(1869년) 10월에는 [도쿄(東京)]라고 이름을 바꾼 에도로 이전되고 말았다.
도쿄 천도를 계획한 사람은 오쿠보토시미치(大久保利通)이다. 오쿠보는, 천황은 구름 위의 존재이어서는 안되며, 이제부터 인민 속으로 거듭나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관습에 젖은 교토를 벗어나 천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곧, 조정을 실질적인 권력으로 삼자는 시위가 바로 천도(遷都)였다. 이 속에는 지금까지 일본의 중심이었던 관동인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관동인(關東人)의 마음은 아직 막부에 남아 있기 때문에 신정부는 에도시민의 마음을 시급히 다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교토시민은 물론 도쿄 천도에 반대했으나, 천황의 도쿄 이전의 대가로 지세(地稅)의 일시적인 면제와, 15만량의 [산업 기금]을 푸는 것으로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