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문양 [民俗紋樣]

國寶9號, 10號, 11號 - 石塔

yoohyun 2006. 10. 31. 12:55


國寶9號 :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所在地  : 忠南夫餘郡夫餘邑東南里379
時代    : 百濟後期

この石塔は益山の彌勒寺址石塔と共に百濟時代に建てられた貴重な塔で、
わが国の石塔の始祖といえる. 木造建物の架構を模倣しているが、
単調ではない整頓された形で、洗練された創意的な造型を成しており、
全体的に莊重明快で、格調高い氣品を醸し出している.
初層塔身の4面に唐國の蘇定方が百濟を滅ぼした後、紀功文を刻んで置いたが
それはこの塔が建立されて長い月日が経った後のことだ.
この辺の發掘調査で定林寺銘が入っている瓦が多数出土された.
百濟時代の石塔は、國寶第11號とこの塔の二つしか残っていないという点でも
貴重な資料として評價されている。

국보9호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   대 :  백제시대 후기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
명쾌하고 격조 높은 기품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國寶10號  : 實相寺百丈菴三層石塔
所在地    : 全北南原市山內面大井里
時代      : 統一新羅

實相寺は智異山天皇峰の西側にある寺で, 統一新羅興德王3年(828年)、
洪陟が創建した. ここから少し北の方へ入った所にある百丈菴は實相寺に
属するこじんまりした庵子で, その下の耕作地に塔が立っている.
基壇の構造や各部の彫刻粧飾でユニークな樣式を見せてくれる,
全高5メートルの異形石塔で, 基壇部は、方形の臺石から成り、その上に
方形の3層塔身部が置かれている.下の塔身は幅に比べ高さがあり、
2層, 3層の塔身は一般石塔と同じく減縮度がすくない.
屋蓋石の屋蓋敷に層壇を置かなかったのも珍しい. 相輪部の露盤, 覆鉢,
寶蓋, 水煙がすべて擦柱に重ねられているのも稀貴な例である.
塔全體の構造が独特なうえに、各層の塔身上部は木造建築の頭孔形を
模刻している。1層の塔身4面には菩薩像と神將像を, 2層には奏樂天人像2具づつ,
3層4面には天人坐像1具づつを彫刻した、塔身全體を天人,菩薩,天王像などで
埋めた華麗な塔である.
統一新羅時代の後期に立てられたものと推測するこの塔は、形式に片寄らない
自由自在な構造が特に目立つ、当時を代表する美しい石塔の一つといえる。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쪽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선하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기단(基壇) 구조와 각부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 주는 전고 5m의
이형석탑으로, 기단부는 방형 대석을 놓아서 기단을 삼았으며 그 위로 방형 3층
탑신부를 올려놓고 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아래층 탑신은 폭에 비해 높이가
높으며 2층, 3층의 탑신은 일반 석탑에서와 같이 감축도가 심하지 않다.
옥개석의 옥개받침에 층단을 두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보개,
수연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있는 것도 희귀한 예이다. 탑 전체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각층 탑신 상부에는 목조건축의 두공형을 모각하였다
1층 탑신 4면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 탑신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을,
3층 탑신 4면에는 천인좌상 1구 씩을 각각 새기고 있어 탑신 전체가 천인, 보살,
천왕상등으로 가득 찬 화려한 탑이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國寶11號  : 彌勒寺址石塔
所在地    : 全北益山市金馬面
時代      : 百濟後期

百濟最大の寺であった益山彌勒寺址の塔で、方形の平面は現在6層までしか
残っておらず, 高さは14.24メートル、半分は崩れてしまい一方をセメントで
補强した半形になっている.
塔の建立は世紀600年頃と推定しており, 韓國石塔の始源樣式で、木塔より石塔へと
移行する過程の構造を見せてくれる重要な塔である. 塔の規模もまた韓國石塔中、
最大な傑作である.
初層塔身は、正面3間、側面3間の構造で、中央間には四方に扉が付いていて
內部に通じる。 塔內部中央には巨大な四角の石柱が立てられ、塔身外面には、
エンタシス手法の四角石柱の上に,木造建物の昌枋, 平枋を設置し、頭孔形式の
敷石が屋蓋石を支えている. 2層から塔身が低くなり、各部材の構造も
簡潔に省略され、上にのぼるほど幅が縮む.
これと同じ石塔が東側に一つあり, 二つの石塔の間に木塔もあって、
この彌勒寺には元來三つの塔が有った.

국보11호 :  미륵사지석탑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   대   : 백제시대 후기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이 탑의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 6층까지 남아 있으며, 높이가 14.24m이다.
반쯤 무너져 버려서 한쪽을 시멘트로 보강을 하여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탑의 건립연대는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源樣式)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초층탑신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에 중앙칸에는 사방에 문이 나 있고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탑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네모난 돌기둥이 서 있다. 탑신 외면에는 엔타시스수법의
네모난 돌기둥들 위에 목조건물의 창방(昌枋), 평방(平枋)을 설치하고 그 위에
두공 형식의 받침돌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2층 이상은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재의 구조도 간결하게 생략되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 들었다.
이와 똑같이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었으며, 두 석탑 사이에도 목탑이 있어
이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