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의 먼지를 털어내고...
하필이면 오밤중에 국제축구경기가 있을 게 뭐람.... 아침 8시반까지 모임장소에
도착하려면 일찍 서둘러야 하는데 축구 끝난 시각이 두시 가까웠고, 그래도 이겨서
기분좋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이번 가을여행은 처음부터 임원들을 힘들게 하고 애타게 만들었다. 참가인원이 예상을
훨씬 밑돌기 때문이었다. 겨우 35명, 버스 한 대로 가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당한 숫자라고
나는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구석이 남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단풍구경도 하고 우정도 다지기 위해 동해안 나들이 길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하자 임원들은 아침 거른 노녀들 행여 허기질세라 이것저것 보따리를 풀어
먹을 것을 돌린다. 계란까지 삶아 온 엽엽한 총무는 간식보따리 위에 소금을 테입으로
붙여놓고.. .. 두서너 뉴페이스를 빼곤 모두 봄가을마다 만나는 얼굴들. 2박3일동안
머리는 비우고 가슴과 입만 열어놓은 채 그들과 어울려 먹고 웃고 노래하고 떠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절로 입가장자리가 풀린다.
올 단풍이 유난히도 고운건가. 우리 금수감산의 단풍이 워낙 이토록 아름다운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높고 낮은 먼 산의 오묘한 빛깔들! 일본의 어느 작가는 늘 자연을
칭찬하러 간다고 표현하더니, 진정 이 단풍을 무슨 단어를 써서 칭찬해야 옳을지 내 짧은
어훠력으론 표현이 막막하다. 이처럼 훌륭한 관광자원이 있는데, 조금만 머리를 쓰면
온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텐데 관광공사는 무얼하고 있담... 잠시 난 애국자가 된다.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지는데는 절의 경내만큼 완벽한 곳은 없으리라.
부석사의 산문을 지나 본당을 향하는 길에서 마주친 샛노란 은행나무와 자지러질 듯 고운
다홍색의 어린 단풍나무들은 걸음에 자신 없는 나를 기어이 작은 바위에 앉혀놓는다.
새벽부터 일어나 온천으로 재충전한 우리는 어젯밤의 끔찍했던 해프닝을 여행의 추억거리로
가슴에 담고 동해로 향했다.
___ 비가 내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산 속이었다. 질러가려다 자갈길로 잘못 들어선 버스가
되짚어 제 길을 찾으려면 어디까지 후진을 해야 옳은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앞뒤에서 오른쪽, 왼쪽, 오라잇, 오라잇, 임원들이 필사적으로 후진을 인도하지만 버스는
비틀거리다 스톱, 또다시 있는 대로 고함을 치면 뒤뚱뒤뚱, 논두렁으로 바퀴가 빠지기라도
하면 우린 그냥 산속에 갇힐 판이었다. 시간은 여지없이 흐르고 빗발은 굵어지는데, 황당함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수호천사! 검은 지프를 몰고 온 여인은
헤드라이트로 버스를 되돌릴 수 있는 곳까지 유도해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어젯밤에 내린 비로 말끔해진 동해가 손만 내밀면 닿을 듯 곁에서 일렁거린다.
난 망망대해에 아직도 못다한 꿈을 띄워 본다. 늘 한구석에 조용히 있던 친구가 마이크를
잡고 구수한 이야기로 모두를 웃기더니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아안다..'
분위기 그대로 살린 우리 가곡을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 따라 부르고는 우레같은 박수로
앙코르를 청한다.
조금은 벅찬듯한 여행 스케줄인데도 한명의 처짐도 없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명소 앞에 내려주고 시간만 일러주면 삼삼오오 짝지어 진지하게 둘러보고 오는 모범생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이튿날도 저물어갔다.
그날 저녁 만찬 때 웃지 못할 해프닝이 또다시 발생했다. 제대로 된 풀코스 디너를
오랜만에 맛보려나보다 기대에 부푼 우리 앞에 나타난 접시는 기대 이하가 아닌
기본 이하였다. 그나마 서브가 중단된 채 시간만 흐르고 죄없는 임원들이 주방까지
쫓아갔지만 속수무책. 어수선한 분위기의 엉망진창 디너를 사회자가 재치로 마무리 짓고,
곧 여흥으로 유도한다. 우린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유치한 게임과 퀴즈를 즐기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흥겨워했지.
정해진 시간이라고 이렇게 빨리 흘러도 되는건지. 오전에 화엄사와 낙산사를 들러 남은
속세의 먼지를 털어 내고, 전복죽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여행스케줄은 바닥이 났다.
돌아오는 버스속은 유난히 조용했다. 모두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면서 짧은 나들이 동안에 벌어졌던 이런저런일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 (2000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