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一般常識]
일본의 마음; 한국의 마음
yoohyun
2007. 10. 22. 15:44
지난 17일 오후 제주도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원로들이 인터넷을 통해 교류를 갖게 된지 어언 8년,
2001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벌갈아가며 교류회를 갖게 되었고,
이번은 학국차례여서 제주도에서 교류회를 열게 된 것이지요.
오후 3시부터 두시간동안 가진 회의에서 서울 회원이신 신현하님께서 아래와 같은
강의를 유창한 일본어로 하여 일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글로 적어주셨기에 올립니다. 한번 읽어볼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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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마음 ・ 한국의 마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 받은 신 현 하 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죄송하오나, 일본 친구 여러분께 새삼 인사 드립니다.
일본 친구 여러분! 먼 길을 무릅쓰고 한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논어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있는데, 바로 오늘 이 지리의 광경을 말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일 양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회동하여, 상호 이해를 깊게 하고 우호 친선을 도모하려는 「국제교류」의 장입니다.
최근 흔히들 「국제화」・「세계화」라든가, 「국제 교류」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국제교류」란 즉 「문화교류」를 말하는 것인데, 저는 이 말을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사귀므로 써, 자신이 변해 가는 계기를 붙잡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 데 「사람과 물건이 교류하면 문화가 교류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문화를 서로 순순히 받아 들여, 그 차이를 정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 가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참다운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며 국제화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문화 교류의 수순으로서는 『눈에 보이는 문화 교류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제목을 「일본의 마음・한국의 마음」이라고 정한 것은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어떤 민족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문화를 살펴봐야겠지요. 왜냐 하면 『문화란、그 나라의 역사와 풍토 속에서 그 민족의 정서가 육성하고, 영위하고, 재배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그 민족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씨는 그의 저서 『미국 소묘 (アメリカ素描)』에서,
「문명이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합리적인 것・기능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대해, 문화는 오히려 불합리한 것이며 특정한 집단, 예를 들면 민족과 같은 집단에 있어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것으로서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보편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남에게 미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교통 신호에서 파랑은 앞으로 가고 빨강은 멈춘다는 것은 문명이며, 이 규칙은 현재 세계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부인이 미닫이를 열 때 무릎을 꿇고 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문화이며, 여기에서는 합리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언어, 풍속, 문화 등에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양 민족은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왔으며, 각기 다른 풍토 속에서 생을 영위해 왔기 때문에, 그것들 사이에는 상이한 점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양국 문화의 이질적인 측면은, 문명이 공통적이기 때문에 한층 부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석학・李御寧씨는 일본문화를 「축소 지향의 문화」라고 논해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을 본 따서 말한다면, 한국의 문화는 「확대 지향의 문화」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어에는 「왕」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말이 많이 눈에 뜨입니다. 이것은 한 자의 「임금 왕(王)」자에 해당하며,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왕대포」라고 하면 「큰 잔에 부은 술」 즉 「사발 같은 잔에 부은 술」, 「왕벌」이라고 하면 「말벌」, 「왕 눈」이라고 하면 「도토리 눈」을 뜻합니다.
한국어의 저변에는 강력한 상대와 서로 싸울 때의 방패로서 상대 보다 자신을 강하게 또는 크게 보이려고 한다든지, 사물을 실물보다 과장・허식한다든지 하는 의식이 깔려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한국어에는 「왕」이라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사는 있으나 축소를 나타내는 그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비애와 낙관이 표리가 되어 있는 문화」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고 대범」하며, 「낙천적」이라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살아가기 위한 지혜로서 상대방에 대해 실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를 실상 이상으로 크게 보이려고 하는 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어에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사보다도 축소를 나타내는 그것 쪽이 보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면 「마메뎅큐(豆電球~소형 전구) <손전등 같은 데 쓰이는작은전구>」「마메오토코(豆男:몸집이작은사내)」「마메찌시키(豆知識: 미니지식)」,「히나 닝교(ひな人形: 작은 인형)」등과 같이 쓰일때의 「마메(豆)、히나)」라는 접두사가 그것입니다.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에 쓰여진 세이쇼나공(清少納言)의 수필 『마쿠라노소
시(枕草子)』155단에,
「なにもなにも、ちひさきものはみなうつくし」(무엇이든지 작은 것은 모두 사랑스럽고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일본어에서는 무엇을 만드는 것을 「사이쿠스루 (細工する)」라고 표현 합니다. 즉 만든다는 것은 「자질구래 하게 축소 하는 공작」인 것입니다.
작은 것을 사랑하는 일본인의 마음은 부채를 축소하여 접어서 작게 하는 선자(扇子)를 만들어 내고, 장대한 자연을 축소한 선사(禪寺)의 방장(方丈) 의 뜰(10척 사방의 뜰)을 만들어 냈는가 하면, 저 독특한 이레코식(入れ子式~크기의 차례로 포개어 안에 넣을 수 있게 만든 그릇이나 상자) 문화까지 낳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지혜는 드디어 트랜지스터 문화를 낳아, 전후의 일본 경제 부흥에 크게 공헌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저는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즐기는데, 이 하이쿠는 세계에서 가장 축소된 형식의 노래(詩)로서, 겨우 17 글자 속에 넓은 우주와 사계절의 시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이쿠에 요청되고 있는 계어(季語~춘하추동의 계절 감을 나타내기 위해 반듯이 넣도록 정해진 말)는, 일본의 풍토와 합치되는 미의식이 풍부한 일본인의 「마음의 멋진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에 대한 계어를 보면, 봄은 「산이 웃는다」, 여름은 「산이 (뚝뚝) 듣는다」, 가을은 「산이 생각한다」, 겨울은 「산이 잠잔다」라고 되어 있어, 사계절의 변천이 뚜렷한 일본의 기후와 풍토를 얄미우리 만큼 미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인들은, 자연을 문학에 주입하여 미화하는 그들의 감성의 섬세함, 예리함을 또렷이 여봐란듯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가 밝혀지지 않은 하이쿠에
「信濃には月と仏とおらがそば」(사나노<信濃~지역 명>에는 달과 부처와 우리네 메일 국수)
라는 구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라(내 고장) 자랑」의 노래이겠지요.
옛적부터 일본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를 교환할 때, 「당신의 나라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때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상대의 「태어난 곳」 즉 「고향」, 나아가서는 「출신 번(藩~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을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지방분권성(地方分權性) 정치제도를 유지해 온 일본은, 이 외에도 「우리 (내) 마을」「우리 (내) 나라 자랑」「우리 (내) 나라 사투리」 등 향수를 자아내는 말이 많습니다. 그 때의 「나라」는 「향토」 즉 「출신 번」을 뜻하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일본어에는 「잇쇼오켄메이(一生懸命)」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一所懸命가 변형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같은 「곳(所~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一心)」이 되어, 공동체인 마을의 논밭을 마을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목숨을 걸고 경작하며, 다 함께 마을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잇쇼오켄메이 (목숨을 걸고)」, 마을 신사에 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농작의 풍요를 기원하고, 무악을 봉납하고, 공동으로 축제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동료 의식」으로 뭉쳐, 「성씨(姓氏)」가 같고 다름을 초월하여 「운명공동체」로서 단결하는 것입니다.
일본어에 「村八分(무라하찌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나 가족이 마을 사람들의 의논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한국 사람에 대해 「당신네 나라는 어디 입니까?」라고 물으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자못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에 있어서의 「나라」라는 말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 그 자체로서 파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실로 오랜 동안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그 사회의 발전도 자연히 획일적인 것이며, 「나라」라는 말은 오로지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나라」는 수없이 반복된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에 즈음하여, 민초를 지킨다고 하는 「나라」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 나아가서는 동족이라는 혈연 관계로 뭉쳐,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에는 일본과 같이 신을 모시는 신사는 없고, 그 대신 씨족 단위로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잇쇼오켄메이」라는 「운명공동체」로서의 「마을 의식」은 빈약하고, 사람들은 「혈연 집단」을 유지해 가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끼리 초대면일 때는 먼저 상대방의 「성씨」를 서로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같은 「성씨」이면 「본관」이 같은가 다른가, 만일 「본관」이 같다면 「대수」 즉 시조로부터 헤어서 몇 대째인가를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친족간의 상하 서열에 의해 친소 관계를 측정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행동 규준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에도(江戶~徳川<とくがわ> 막부) 세대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는,
「敷島の大和心を人問わば朝日に匂う山桜かな」
(일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냐고 남이 묻는다면, 아침 해에 빛나는 벚꽃이라고 할까나)」 라고 일본인의 마음을 벚꽃에 비유해 읊었습니다.
* 敷島(しきしま)나 大和(やまと)는 일본의 딴 이름.
일본의 나라 꽃인 「사쿠라(さくら櫻)」는, 필 때는 일제히 피기 시작해 짧은 생명을 「잇쇼켄메이(一所懸命)」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고는 꽃이 질 때도 무심하게 일제히 집니다. 일본 사람들은 벚꽃의 「아름다움」・「화려함」은 물론이려니와, 꽃이 질 직전이 「산뜻」하고 「미련 없이 깨끗」한 것을 자기들의 「마음」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한창인 때도, 상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는 서슴없이 「かんにん<간닝~용서해>」・「参った<마있다~항복>」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싸움은 즉시 중지되고, 그때까지의 일을 「水に流し<미즈니 나가시 ~물에 흘려 버리다 = 지나간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일체 탓하지 않음>」, 「一件落着<잇껭 라꾸쨔구~한 건 낙착>」, 모든 것은 원만히 마무리 지어 진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의 나라 꽃 「무궁화」는, 꽃 자체는 모란 꽃이나 장미 꽃처럼 농염・화려한 것은 되지 못하고, 또한 벚꽃처럼 젊은 피가 넘치며 꽃이 질 직전의 모습이 미련 없이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꽃 한 송이를 본다면 나팔꽃처럼 하루만의 생명이지만 한 구루의 나무 전체로 본다면 연이어 백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피어, 언제 보아도 많은 꽃을 피우고 있는 「끈덕짐(끈질김)」이 있습니다.
일본의 국가 사회는 무사들이 실권을 장악한 이래 오랜 전란의 세월을 겪어 왔으나, 그것이 일본 열도 안에서의 동족끼리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지거나 이기거나 결국은 일본 사람들만의 내부 분쟁으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싸움은 무사 집단이 하며, 승패는 대장끼리 결판을 내고, 그 뒤의 사회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대세는 승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지정학적 조건이 불리한 한(韓)민족은, 수 없을 만큼의 외침을 받아 종말에는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의 역사를 참고 견뎌 민족을 수호하고 개성이 강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궁화의 「끈덕짐(끈질김)」이었던 것입니다.
13세기,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 즉 「원(元)」을 상대로 강화도를 전거 (典據)로 한 고려 왕조가, 34년이란 긴 세월 동안 반(反) 몽골 저항 운동을 계속한 장렬한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한국 사람의 「끈덕짐(끈질김)」은 외국 사람, 특히 일본 사람으로부터는 「끈질기다(치근치근하다)」・「집요하다」라고 간파되어, 빈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완고하리 만큼인 「끈덕짐」 즉 「한(恨)」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한 번 앙심을 먹으면 상대의 기분이나 변명 따위는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고 같은 것을 계속 주장하는 한국 사람의 「끈덕짐」에, 일본 사람은 그야 말로 「参る<마이루~질리다>」하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은 끈덕지다」, 「조선 사람은 싫다」라는 말은, 과거를 깨끗이 「물에 흘려 보내고 잊어 버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일본 사람의 참기 어려운 기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 다.
한국 사람의 「끈질김」・「격심함」은 예술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 2세로서 국제적 바이올리니스트인 정찬우(丁讚宇) 씨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연주는 표현의 진폭의 크기와 땅기는 힘이 세다. 대중 가요로 말 하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나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를 닮았다. 한편 일본 사람의 연주는 시마쿠라 찌요코(島倉千代子)처럼 단정하며 섬세한 음영을 느낀다」라고 합니다.
즉 한국 사람의 연주는 「대륙적」이며 「격심하다」고 표현되며, 일본 사람의 연주는 「섬세」하며 「미니어치 가든(箱庭的~하꼬니와테끼)」과 같다고 평가된 다는 것입니다.
일본 속담에 「似て非なる者(니테 히나루 모노~닮았으면서도 다른 것)」이란 말이 있는데, 일한 양국의 「식문화(食文化)」가 바로 이에 해당하겠지요.
일반적으로 『일본 요리는 색채의 배합이 미술적이며 그 상차림도 미학적으로 간추려져 있기 때문에, 「눈으로 맛보는 요리」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 요리는 색채가 빛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많기 때문에, 「혀로 맛보는 요리」이다』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식사 방법에 대해서 말하면 한국과 일본은 함께 「젓가락」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젓가락만을 사용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젓가락과 숟가락 양쪽을 능숙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숟가락」 문화 쪽이 주라 하겠습니다.
일본어에도 「숟가락」, 「숟가락 짐작(손짐작<匙加減~사지카겡>)」(약을 조제 하는 눈가늠) 이란 말이 있으나, 이는 식사할 때 쓰는 숟가락을 가리키기 보다 약을 조제할 때 쓰는 숟가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번에도 드실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한국 요리에는 「탕(湯)」이라는 말이 붙는 음식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삼계탕」, 「곰탕」, 「설렁탕」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들 요리는 거의가 국물이 있고 뜨겁기 때문에 큰 그릇에 나누어 담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숟가락 없이는 입으로 가져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의 식사 방법은 식기를 식탁 위에 놓은 채 음식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입에 가져갑니다. 한국에서는 식기를 손으로 들어올려 입에 갖다 대든지 하면, 「입에 식기를 갖다 대고 먹는 것은 개나 소가 하는 짓」이라고 꾸중을 듣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요리는 젓가락만으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며, 비록 국물이 있는 음식이라도 작은 그릇에 덜어서 담기 때문에 반듯이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숟가락을 쓰지 않는 일본 사람들은 식사 때는 밥그릇을 손으로 들어올려 입에 대고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사람들의 식사 방법은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화는 「한(恨)의 문화」, 일본 문화는 「수치(恥)의 문화」 라고 하는 데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가지각색인 문화의 인류학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수치(恥)」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罪)」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전후에 많이 읽힌 『국화와 칼(菊と刀)』의 저자・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는 「수치(恥)」를 기조로 한 문화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설에 의하면, 일본 사람은 「치욕감(恥辱感)」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어 덕(德)의 근본을 「수치」에 붙박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선행의 모든 규칙을 실행하는 사람이라 하고,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느 때는 「덕이 있는 사람」, 어느 때는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죄인으로서 포박을 당하는」 것을 가장 「수치」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 한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진훈(戰陣訓<군인에게 내려진 전쟁 터의 훈계>)의 가르침을 완고히 지켜, 「포로로서 포박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고 깨끗이 자결한 수많은 군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베네딕토와 같이 「죄」를 기조로 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일본 사람에 있어 이것은 실로 칭찬할만한 값어치가 있는 미덕인 것입니다.
그럼 한국의 「한(恨)의 문화」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한(恨)」이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원망하다」라는 뜻이며, 이를 풀이해서 말하면 「원망하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는 「한(恨)」을 「恨む<우라무-うらむ>」, 「怨む<うらむ>」, 「憾む<うら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의하면 이들 말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처사를 부당하게 여기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며, 또한 복수도 할 수 없고, 잊지 않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별로 구별하지 않고 쓰여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한(恨)」과 「원(怨)」은 전혀 다른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원(怨)」이란 다른 사람에 대해 또는 자신의 외부의 무엇인가에 대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한(恨)」은 오히려 자신의 내부에 침전하여 퇴적되는 정(情)의 덩어리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은 바라는 것이 없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것만으로도 「원망하다」 즉 「원(怨)」을 가지게 됩니다만, 그것은 「한(恨)」이 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한(恨)」은 따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아도 스스로 솟아나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반듯이 소원이 있었기에, 또는 자기 자신에 반듯이 능력이 있었기에, 무엇인가의 좌절감이 「한(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恨)」은 이루어지지 못한 바램이며, 실현되지 못한 꿈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러기에 「한(恨)」은 상대를 원망한다든지 복수를 하는 일이 없으며, 안으로 틀어박혀 눈물을 꾹 참고 견뎌내는 「정(情)」 즉 「마음(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마음에 쌓이고 쌓인 「한(恨)」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기원(祈願)이 성취되면, 마치 자욱하게 끼였던 아침 안개가 벗겨지듯이 자연히 풀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원(怨)」은, 일본에서 연극이나 영화나 소설 등으로 유명한 저 『忠臣蔵(ちゅうしんぐら)』에 등장하는 아카호 의사(赤穂義士)들이 기라(吉良) 저택으로 쳐들어가는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 『忠臣蔵』에 심취하는 것은 아카호 47의사 (義士)의 복수에 공감하는 탓이겠습니다만, 한국 사람도 이 점에 있어서는 동감입니다.
한국 민요에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있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이 슬픈 곡조인 「아리랑」은 사랑의 노래로서 즐겨 불려지는데, 이 노래는 한국 사람의 「한」의 「정(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한국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르는 「한풀이」의 노래입니다.
일전에 어느 축구경기장에서 국제시합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응원 나온 한국 사람들은, 응원가로서는 도저히 박자가 맞지 않는 삼박자 왈츠 곡인 이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 있어서의 「아리랑」은, 마음 속에 굳게 다짐한 일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원(祈願)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리랑 고개」는 실재의 고개가 아닙니다. 「아리랑 고개」는 한국 사람들의 「인생의 고개」이며, 한국 사람의 「한의 고개」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 하나 하나의 가슴마다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인 것입니다.
그럼 한국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한(恨)」을 품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머리 속에 동북 아세아 지도를 그려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그리신 지도와 같이 한반도는 아세아 대륙의 끝머리에 마치 유방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 대륙의 북방에는 훈족 또는 흉노족이, 그리고 남방에는 한(漢)족이라는 강대한 민족이 자리를 잡고 있어, 한(韓)민족은 좋든 싫든 그들 세력의 영향을 깡그리 받으며 살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해협을 건너 동쪽에는 일본 민족이 있어, 16 세기 말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질없는 야망에 의해 8년이란 긴 세월, 이른바 분로쿠・게이쵸의 전역이라 이름하는 왜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9세기 말, 일본의 대륙 침공의 발판이 된 한반도는 청일 ・노일 전쟁의 전장 터가 되었으며, 종래는 36년간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질곡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제이차대전이 끝난 후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잠깐, 동서 양 진영의 각축의 완충지대로서 국토는 분단되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참혹한 동족 상잔의 전쟁을 겪은 뒤에도, 아직껏 지구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분단 국가의 비운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조건으로 말미아마, 우리 민족은 5천년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 무려 9백 수십 번에 이르는 외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마다 치욕을 맛보았으며, 신산을 핥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외침에 더하여 국내 정치도 골고루 미치지 못하는 일이 겹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소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기 자신이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꿈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현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마음의 바램이, 그때 맛보았던 수 없는 좌절감이, 마음 내부에 침전하여 쌓이고 쌓인 정의 덩어리가 「한(恨)」이 된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일 양국의 문화의 특성을 비교해 보았는데, 여기에 나타난 양 국민의 문화나 습관의 차이는 긴 역사의 체험에 뿌리를 둔 풍속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그 차이를 가지고 「이 민족은 우수하다, 저 민족은 열등하다」라고 구별하는 등 그 우열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각 민족의 문화나 습관의 차이는 그것이 「추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며, 더구나 서로 비난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서로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이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새삼 말씀 드린 필요조차 없겠지요.
거듭 말씀 드리겠는데,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는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기쁨이나 슬픔을 나눠 갖는 마음의 퍼짐이, 나아가서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물 가에 핀 한 송이 나팔꽃을 애틋이 여겨 다치지 않게 하려는 상냥한 마음씨, 즉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물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베어 있는 찌요죠(千代女)의 하이쿠 한 수를 곁들여 오늘의 이야기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朝顔につるべとられて貰い水(아사가오니 쓰루베 토라레테 모라이 미즈)」
(우물 가에 핀 나팔꽃 넝쿨이 두레박 줄(장대)에 감겨 있어 물을 길을 수 없으나, 차마 그 넝쿨을 두레박 줄(장대)에서 떼내지 못해 이웃 집에서 물을 얻어온다는 뜻)
장시간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원로들이 인터넷을 통해 교류를 갖게 된지 어언 8년,
2001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벌갈아가며 교류회를 갖게 되었고,
이번은 학국차례여서 제주도에서 교류회를 열게 된 것이지요.
오후 3시부터 두시간동안 가진 회의에서 서울 회원이신 신현하님께서 아래와 같은
강의를 유창한 일본어로 하여 일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글로 적어주셨기에 올립니다. 한번 읽어볼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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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마음 ・ 한국의 마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 받은 신 현 하 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죄송하오나, 일본 친구 여러분께 새삼 인사 드립니다.
일본 친구 여러분! 먼 길을 무릅쓰고 한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논어에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있는데, 바로 오늘 이 지리의 광경을 말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일 양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회동하여, 상호 이해를 깊게 하고 우호 친선을 도모하려는 「국제교류」의 장입니다.
최근 흔히들 「국제화」・「세계화」라든가, 「국제 교류」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국제교류」란 즉 「문화교류」를 말하는 것인데, 저는 이 말을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사귀므로 써, 자신이 변해 가는 계기를 붙잡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 데 「사람과 물건이 교류하면 문화가 교류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문화를 서로 순순히 받아 들여, 그 차이를 정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 가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참다운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며 국제화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문화 교류의 수순으로서는 『눈에 보이는 문화 교류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제목을 「일본의 마음・한국의 마음」이라고 정한 것은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어떤 민족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문화를 살펴봐야겠지요. 왜냐 하면 『문화란、그 나라의 역사와 풍토 속에서 그 민족의 정서가 육성하고, 영위하고, 재배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그 민족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씨는 그의 저서 『미국 소묘 (アメリカ素描)』에서,
「문명이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합리적인 것・기능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대해, 문화는 오히려 불합리한 것이며 특정한 집단, 예를 들면 민족과 같은 집단에 있어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것으로서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보편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남에게 미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교통 신호에서 파랑은 앞으로 가고 빨강은 멈춘다는 것은 문명이며, 이 규칙은 현재 세계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부인이 미닫이를 열 때 무릎을 꿇고 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문화이며, 여기에서는 합리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언어, 풍속, 문화 등에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양 민족은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왔으며, 각기 다른 풍토 속에서 생을 영위해 왔기 때문에, 그것들 사이에는 상이한 점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양국 문화의 이질적인 측면은, 문명이 공통적이기 때문에 한층 부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석학・李御寧씨는 일본문화를 「축소 지향의 문화」라고 논해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을 본 따서 말한다면, 한국의 문화는 「확대 지향의 문화」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어에는 「왕」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말이 많이 눈에 뜨입니다. 이것은 한 자의 「임금 왕(王)」자에 해당하며,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왕대포」라고 하면 「큰 잔에 부은 술」 즉 「사발 같은 잔에 부은 술」, 「왕벌」이라고 하면 「말벌」, 「왕 눈」이라고 하면 「도토리 눈」을 뜻합니다.
한국어의 저변에는 강력한 상대와 서로 싸울 때의 방패로서 상대 보다 자신을 강하게 또는 크게 보이려고 한다든지, 사물을 실물보다 과장・허식한다든지 하는 의식이 깔려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한국어에는 「왕」이라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사는 있으나 축소를 나타내는 그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비애와 낙관이 표리가 되어 있는 문화」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고 대범」하며, 「낙천적」이라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살아가기 위한 지혜로서 상대방에 대해 실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를 실상 이상으로 크게 보이려고 하는 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어에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사보다도 축소를 나타내는 그것 쪽이 보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면 「마메뎅큐(豆電球~소형 전구) <손전등 같은 데 쓰이는작은전구>」「마메오토코(豆男:몸집이작은사내)」「마메찌시키(豆知識: 미니지식)」,「히나 닝교(ひな人形: 작은 인형)」등과 같이 쓰일때의 「마메(豆)、히나)」라는 접두사가 그것입니다.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에 쓰여진 세이쇼나공(清少納言)의 수필 『마쿠라노소
시(枕草子)』155단에,
「なにもなにも、ちひさきものはみなうつくし」(무엇이든지 작은 것은 모두 사랑스럽고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일본어에서는 무엇을 만드는 것을 「사이쿠스루 (細工する)」라고 표현 합니다. 즉 만든다는 것은 「자질구래 하게 축소 하는 공작」인 것입니다.
작은 것을 사랑하는 일본인의 마음은 부채를 축소하여 접어서 작게 하는 선자(扇子)를 만들어 내고, 장대한 자연을 축소한 선사(禪寺)의 방장(方丈) 의 뜰(10척 사방의 뜰)을 만들어 냈는가 하면, 저 독특한 이레코식(入れ子式~크기의 차례로 포개어 안에 넣을 수 있게 만든 그릇이나 상자) 문화까지 낳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지혜는 드디어 트랜지스터 문화를 낳아, 전후의 일본 경제 부흥에 크게 공헌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저는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즐기는데, 이 하이쿠는 세계에서 가장 축소된 형식의 노래(詩)로서, 겨우 17 글자 속에 넓은 우주와 사계절의 시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이쿠에 요청되고 있는 계어(季語~춘하추동의 계절 감을 나타내기 위해 반듯이 넣도록 정해진 말)는, 일본의 풍토와 합치되는 미의식이 풍부한 일본인의 「마음의 멋진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에 대한 계어를 보면, 봄은 「산이 웃는다」, 여름은 「산이 (뚝뚝) 듣는다」, 가을은 「산이 생각한다」, 겨울은 「산이 잠잔다」라고 되어 있어, 사계절의 변천이 뚜렷한 일본의 기후와 풍토를 얄미우리 만큼 미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인들은, 자연을 문학에 주입하여 미화하는 그들의 감성의 섬세함, 예리함을 또렷이 여봐란듯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가 밝혀지지 않은 하이쿠에
「信濃には月と仏とおらがそば」(사나노<信濃~지역 명>에는 달과 부처와 우리네 메일 국수)
라는 구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라(내 고장) 자랑」의 노래이겠지요.
옛적부터 일본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를 교환할 때, 「당신의 나라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때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상대의 「태어난 곳」 즉 「고향」, 나아가서는 「출신 번(藩~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을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지방분권성(地方分權性) 정치제도를 유지해 온 일본은, 이 외에도 「우리 (내) 마을」「우리 (내) 나라 자랑」「우리 (내) 나라 사투리」 등 향수를 자아내는 말이 많습니다. 그 때의 「나라」는 「향토」 즉 「출신 번」을 뜻하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일본어에는 「잇쇼오켄메이(一生懸命)」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一所懸命가 변형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같은 「곳(所~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一心)」이 되어, 공동체인 마을의 논밭을 마을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목숨을 걸고 경작하며, 다 함께 마을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잇쇼오켄메이 (목숨을 걸고)」, 마을 신사에 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농작의 풍요를 기원하고, 무악을 봉납하고, 공동으로 축제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동료 의식」으로 뭉쳐, 「성씨(姓氏)」가 같고 다름을 초월하여 「운명공동체」로서 단결하는 것입니다.
일본어에 「村八分(무라하찌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나 가족이 마을 사람들의 의논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한국 사람에 대해 「당신네 나라는 어디 입니까?」라고 물으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자못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에 있어서의 「나라」라는 말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 그 자체로서 파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실로 오랜 동안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그 사회의 발전도 자연히 획일적인 것이며, 「나라」라는 말은 오로지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나라」는 수없이 반복된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에 즈음하여, 민초를 지킨다고 하는 「나라」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 나아가서는 동족이라는 혈연 관계로 뭉쳐,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에는 일본과 같이 신을 모시는 신사는 없고, 그 대신 씨족 단위로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잇쇼오켄메이」라는 「운명공동체」로서의 「마을 의식」은 빈약하고, 사람들은 「혈연 집단」을 유지해 가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끼리 초대면일 때는 먼저 상대방의 「성씨」를 서로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같은 「성씨」이면 「본관」이 같은가 다른가, 만일 「본관」이 같다면 「대수」 즉 시조로부터 헤어서 몇 대째인가를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혈연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친족간의 상하 서열에 의해 친소 관계를 측정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행동 규준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에도(江戶~徳川<とくがわ> 막부) 세대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는,
「敷島の大和心を人問わば朝日に匂う山桜かな」
(일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냐고 남이 묻는다면, 아침 해에 빛나는 벚꽃이라고 할까나)」 라고 일본인의 마음을 벚꽃에 비유해 읊었습니다.
* 敷島(しきしま)나 大和(やまと)는 일본의 딴 이름.
일본의 나라 꽃인 「사쿠라(さくら櫻)」는, 필 때는 일제히 피기 시작해 짧은 생명을 「잇쇼켄메이(一所懸命)」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고는 꽃이 질 때도 무심하게 일제히 집니다. 일본 사람들은 벚꽃의 「아름다움」・「화려함」은 물론이려니와, 꽃이 질 직전이 「산뜻」하고 「미련 없이 깨끗」한 것을 자기들의 「마음」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한창인 때도, 상대에게 대적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는 서슴없이 「かんにん<간닝~용서해>」・「参った<마있다~항복>」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상대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싸움은 즉시 중지되고, 그때까지의 일을 「水に流し<미즈니 나가시 ~물에 흘려 버리다 = 지나간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일체 탓하지 않음>」, 「一件落着<잇껭 라꾸쨔구~한 건 낙착>」, 모든 것은 원만히 마무리 지어 진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의 나라 꽃 「무궁화」는, 꽃 자체는 모란 꽃이나 장미 꽃처럼 농염・화려한 것은 되지 못하고, 또한 벚꽃처럼 젊은 피가 넘치며 꽃이 질 직전의 모습이 미련 없이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꽃 한 송이를 본다면 나팔꽃처럼 하루만의 생명이지만 한 구루의 나무 전체로 본다면 연이어 백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피어, 언제 보아도 많은 꽃을 피우고 있는 「끈덕짐(끈질김)」이 있습니다.
일본의 국가 사회는 무사들이 실권을 장악한 이래 오랜 전란의 세월을 겪어 왔으나, 그것이 일본 열도 안에서의 동족끼리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지거나 이기거나 결국은 일본 사람들만의 내부 분쟁으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싸움은 무사 집단이 하며, 승패는 대장끼리 결판을 내고, 그 뒤의 사회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대세는 승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지정학적 조건이 불리한 한(韓)민족은, 수 없을 만큼의 외침을 받아 종말에는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의 역사를 참고 견뎌 민족을 수호하고 개성이 강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궁화의 「끈덕짐(끈질김)」이었던 것입니다.
13세기, 세계를 제패한 몽골군 즉 「원(元)」을 상대로 강화도를 전거 (典據)로 한 고려 왕조가, 34년이란 긴 세월 동안 반(反) 몽골 저항 운동을 계속한 장렬한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한국 사람의 「끈덕짐(끈질김)」은 외국 사람, 특히 일본 사람으로부터는 「끈질기다(치근치근하다)」・「집요하다」라고 간파되어, 빈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완고하리 만큼인 「끈덕짐」 즉 「한(恨)」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한 번 앙심을 먹으면 상대의 기분이나 변명 따위는 일체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고 같은 것을 계속 주장하는 한국 사람의 「끈덕짐」에, 일본 사람은 그야 말로 「参る<마이루~질리다>」하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은 끈덕지다」, 「조선 사람은 싫다」라는 말은, 과거를 깨끗이 「물에 흘려 보내고 잊어 버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일본 사람의 참기 어려운 기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 다.
한국 사람의 「끈질김」・「격심함」은 예술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 2세로서 국제적 바이올리니스트인 정찬우(丁讚宇) 씨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연주는 표현의 진폭의 크기와 땅기는 힘이 세다. 대중 가요로 말 하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나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를 닮았다. 한편 일본 사람의 연주는 시마쿠라 찌요코(島倉千代子)처럼 단정하며 섬세한 음영을 느낀다」라고 합니다.
즉 한국 사람의 연주는 「대륙적」이며 「격심하다」고 표현되며, 일본 사람의 연주는 「섬세」하며 「미니어치 가든(箱庭的~하꼬니와테끼)」과 같다고 평가된 다는 것입니다.
일본 속담에 「似て非なる者(니테 히나루 모노~닮았으면서도 다른 것)」이란 말이 있는데, 일한 양국의 「식문화(食文化)」가 바로 이에 해당하겠지요.
일반적으로 『일본 요리는 색채의 배합이 미술적이며 그 상차림도 미학적으로 간추려져 있기 때문에, 「눈으로 맛보는 요리」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 요리는 색채가 빛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많기 때문에, 「혀로 맛보는 요리」이다』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식사 방법에 대해서 말하면 한국과 일본은 함께 「젓가락」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젓가락만을 사용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젓가락과 숟가락 양쪽을 능숙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숟가락」 문화 쪽이 주라 하겠습니다.
일본어에도 「숟가락」, 「숟가락 짐작(손짐작<匙加減~사지카겡>)」(약을 조제 하는 눈가늠) 이란 말이 있으나, 이는 식사할 때 쓰는 숟가락을 가리키기 보다 약을 조제할 때 쓰는 숟가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번에도 드실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한국 요리에는 「탕(湯)」이라는 말이 붙는 음식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삼계탕」, 「곰탕」, 「설렁탕」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들 요리는 거의가 국물이 있고 뜨겁기 때문에 큰 그릇에 나누어 담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숟가락 없이는 입으로 가져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의 식사 방법은 식기를 식탁 위에 놓은 채 음식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입에 가져갑니다. 한국에서는 식기를 손으로 들어올려 입에 갖다 대든지 하면, 「입에 식기를 갖다 대고 먹는 것은 개나 소가 하는 짓」이라고 꾸중을 듣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요리는 젓가락만으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며, 비록 국물이 있는 음식이라도 작은 그릇에 덜어서 담기 때문에 반듯이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숟가락을 쓰지 않는 일본 사람들은 식사 때는 밥그릇을 손으로 들어올려 입에 대고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사람들의 식사 방법은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화는 「한(恨)의 문화」, 일본 문화는 「수치(恥)의 문화」 라고 하는 데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가지각색인 문화의 인류학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수치(恥)」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罪)」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전후에 많이 읽힌 『국화와 칼(菊と刀)』의 저자・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는 「수치(恥)」를 기조로 한 문화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설에 의하면, 일본 사람은 「치욕감(恥辱感)」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어 덕(德)의 근본을 「수치」에 붙박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선행의 모든 규칙을 실행하는 사람이라 하고,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느 때는 「덕이 있는 사람」, 어느 때는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죄인으로서 포박을 당하는」 것을 가장 「수치」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 한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진훈(戰陣訓<군인에게 내려진 전쟁 터의 훈계>)의 가르침을 완고히 지켜, 「포로로서 포박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고 깨끗이 자결한 수많은 군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베네딕토와 같이 「죄」를 기조로 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일본 사람에 있어 이것은 실로 칭찬할만한 값어치가 있는 미덕인 것입니다.
그럼 한국의 「한(恨)의 문화」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한(恨)」이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원망하다」라는 뜻이며, 이를 풀이해서 말하면 「원망하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는 「한(恨)」을 「恨む<우라무-うらむ>」, 「怨む<うらむ>」, 「憾む<うら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의하면 이들 말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처사를 부당하게 여기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며, 또한 복수도 할 수 없고, 잊지 않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별로 구별하지 않고 쓰여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한(恨)」과 「원(怨)」은 전혀 다른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원(怨)」이란 다른 사람에 대해 또는 자신의 외부의 무엇인가에 대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한(恨)」은 오히려 자신의 내부에 침전하여 퇴적되는 정(情)의 덩어리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은 바라는 것이 없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것만으로도 「원망하다」 즉 「원(怨)」을 가지게 됩니다만, 그것은 「한(恨)」이 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한(恨)」은 따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아도 스스로 솟아나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반듯이 소원이 있었기에, 또는 자기 자신에 반듯이 능력이 있었기에, 무엇인가의 좌절감이 「한(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恨)」은 이루어지지 못한 바램이며, 실현되지 못한 꿈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러기에 「한(恨)」은 상대를 원망한다든지 복수를 하는 일이 없으며, 안으로 틀어박혀 눈물을 꾹 참고 견뎌내는 「정(情)」 즉 「마음(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마음에 쌓이고 쌓인 「한(恨)」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기원(祈願)이 성취되면, 마치 자욱하게 끼였던 아침 안개가 벗겨지듯이 자연히 풀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원(怨)」은, 일본에서 연극이나 영화나 소설 등으로 유명한 저 『忠臣蔵(ちゅうしんぐら)』에 등장하는 아카호 의사(赤穂義士)들이 기라(吉良) 저택으로 쳐들어가는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 『忠臣蔵』에 심취하는 것은 아카호 47의사 (義士)의 복수에 공감하는 탓이겠습니다만, 한국 사람도 이 점에 있어서는 동감입니다.
한국 민요에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있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이 슬픈 곡조인 「아리랑」은 사랑의 노래로서 즐겨 불려지는데, 이 노래는 한국 사람의 「한」의 「정(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한국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르는 「한풀이」의 노래입니다.
일전에 어느 축구경기장에서 국제시합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응원 나온 한국 사람들은, 응원가로서는 도저히 박자가 맞지 않는 삼박자 왈츠 곡인 이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 있어서의 「아리랑」은, 마음 속에 굳게 다짐한 일들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원(祈願)의 노래인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리랑 고개」는 실재의 고개가 아닙니다. 「아리랑 고개」는 한국 사람들의 「인생의 고개」이며, 한국 사람의 「한의 고개」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 하나 하나의 가슴마다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인 것입니다.
그럼 한국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한(恨)」을 품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머리 속에 동북 아세아 지도를 그려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그리신 지도와 같이 한반도는 아세아 대륙의 끝머리에 마치 유방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 대륙의 북방에는 훈족 또는 흉노족이, 그리고 남방에는 한(漢)족이라는 강대한 민족이 자리를 잡고 있어, 한(韓)민족은 좋든 싫든 그들 세력의 영향을 깡그리 받으며 살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해협을 건너 동쪽에는 일본 민족이 있어, 16 세기 말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질없는 야망에 의해 8년이란 긴 세월, 이른바 분로쿠・게이쵸의 전역이라 이름하는 왜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9세기 말, 일본의 대륙 침공의 발판이 된 한반도는 청일 ・노일 전쟁의 전장 터가 되었으며, 종래는 36년간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질곡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제이차대전이 끝난 후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잠깐, 동서 양 진영의 각축의 완충지대로서 국토는 분단되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참혹한 동족 상잔의 전쟁을 겪은 뒤에도, 아직껏 지구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분단 국가의 비운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조건으로 말미아마, 우리 민족은 5천년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 무려 9백 수십 번에 이르는 외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마다 치욕을 맛보았으며, 신산을 핥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외침에 더하여 국내 정치도 골고루 미치지 못하는 일이 겹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소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기 자신이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꿈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현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마음의 바램이, 그때 맛보았던 수 없는 좌절감이, 마음 내부에 침전하여 쌓이고 쌓인 정의 덩어리가 「한(恨)」이 된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일 양국의 문화의 특성을 비교해 보았는데, 여기에 나타난 양 국민의 문화나 습관의 차이는 긴 역사의 체험에 뿌리를 둔 풍속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그 차이를 가지고 「이 민족은 우수하다, 저 민족은 열등하다」라고 구별하는 등 그 우열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각 민족의 문화나 습관의 차이는 그것이 「추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며, 더구나 서로 비난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서로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이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새삼 말씀 드린 필요조차 없겠지요.
거듭 말씀 드리겠는데,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는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기쁨이나 슬픔을 나눠 갖는 마음의 퍼짐이, 나아가서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물 가에 핀 한 송이 나팔꽃을 애틋이 여겨 다치지 않게 하려는 상냥한 마음씨, 즉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물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베어 있는 찌요죠(千代女)의 하이쿠 한 수를 곁들여 오늘의 이야기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朝顔につるべとられて貰い水(아사가오니 쓰루베 토라레테 모라이 미즈)」
(우물 가에 핀 나팔꽃 넝쿨이 두레박 줄(장대)에 감겨 있어 물을 길을 수 없으나, 차마 그 넝쿨을 두레박 줄(장대)에서 떼내지 못해 이웃 집에서 물을 얻어온다는 뜻)
장시간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