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雜文]

아아, 이제는 눈마저....

yoohyun 2004. 7. 12. 12:26
오랜만에 일본문화원에 들러 책을 교환하는데, 이제 가벼운 인사까지 나누게 된 사서가
'어디 편찮으세요?' 하고 묻는다.
'아뇨, 왜요?'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요'

한차례 가볍게 앓고 나긴 했어도 얼굴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그동안에
팍삭 늙었나보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돌려 표현했겠지....
난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핏기 없는 내 얼굴.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아아,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푸르딩딩한 입이,
바로 그것이 얼굴 전체를 해쓱해 보이도록 한 주범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친구들 모임에 나갔을 때, 모두들 나보고 얼굴이 안됐다고 한마디씩 해서
별다른 걱정거리도 없고 아프지도 않았는데 웬일일까, 기분이 언짢아지려고 하는데,
늦게 나타난 한 친구가, '어머, 너 오늘 눈썹 그리는 거 빼먹었구나'
그 말에 모두들 뒤집어지던 일이 떠올랐다.

화장빨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화장에 따라 인상이 180도 달라지는 여자가 내 주위에도
더러 있다. 그래서 날로 느는 게 화장품 회사이고, 그 종류 또한 기절할 정도로 많은 모양이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초화장에만 7∼8 종류를 찍어 바른다는데,
난 세수하고 고작 한두가지 바르면 끝. 본격적인 화장도 10분이면 넉넉하기 때문에
여지껏 난 화장빨이라는 말이 나하고는 무관한 딴동네말인줄 알았건만,
한군데만 빼먹어도 인상자체가 변하다니....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흐르려고 하는데,
내가 기막혀 하는 것은 이 나이에 화장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요는 서너스텝 정도의 화장코스 중에서 한가지를 벌써 두번씩이나 빠트렸다는 점이다.
더욱이, 외출할 때는 마지막에 큰 거울 앞에 서서 점검을 하는데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력에는 안구시력과 뇌내시력이 있어, 본다는 것은 눈으로 포착한 영상을
뇌에서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보았다는 게 되는 것이라고 하던데,
무심코 눈에 들어온 영상이면 몰라도, 거울 앞에 서서 의식적으로 점검하였는데도
못 보았다는 것은 내 뇌내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인가.
아니, 너무 오래 써먹어서 무디어졌을 뿐이겠지, 하고 마음을 돌려보지만,
우울한 기분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다.